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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S & THESIS

묘妙함으로 점철하는 속초 보광사 지장보살과 그 복장腹藏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23. 3.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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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속초 보광사普光寺라는 불교 사찰은 내가 가 본 적은 없으나 위성지도로 보니 영랑호 남쪽 가에 자리를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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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초 보광사

map.naver.com

 
 
이 사찰 내력은 다음 불교신문 기사에 자세히 정리했으니
 
http://www.ibulgyo.com/news/articleView.html?idxno=172666 

[사찰에서 만나는 우리 역사]  속초 보광사

영랑호 아름다운 풍광 자랑대웅전 불상 복장 안에서400여년 전 발원문 나와내관 위해 발원 첫 불상전문가 감탄 자아낸 보물 속초 영랑호를 가면 보광사(普光寺)가 있다. 해수와 담수가 반반 섞인

www.ibulgyo.com

 
이를 백퍼 취신한다면 이곳은 1938년 청담 스님이 창건한 근대기 사찰이라 하지만 내력이 좀 묘한 구석이 있어 저 아티클에 의하면 "금강산 안양암이 폭우로 유실돼 현재 자리로 이건移建하여 건봉사 속초포교당으로 출발했다" 하거니와 이게 무슨 말인지 좀 고개를 갸우뚱하게 된다. 
 

보광사 위치. 보다시피 영랑호 남단이다.

 
이어지는 기술을 종합하면 보광사는 건봉사 속초포교당이라는 이름으로 출발하는 듯하다. 나중에 정식 절로 승격하고는 보광사라는 이름을 얻었을 것이다.

한데 그 포교당 건립 기초가 된 것이 안양암이라는 금강산 기슭 사찰이었다고 한다. 그것이 폭우로 유실됐는데 보광사 자리로 이건한다? 아마도 그때 폭우로 산사태 같은 피해를 보았고 그에서 살아남은 건물이 있어 그걸 옮겨다가 지은 것이 포교당이라는 뜻인 듯하다. 

문제의 보광사 목조지장보살좌상 또한 저 이건 당시에 안양암에서 옮겨왔을 것이다. 그 불상을 어쩌다가 어떤 불교미술 전공자가 보게 되어 어랏? 이상한데? 근현대 불상이 아니라 시대가 좀 올라가는 조선후기 불상 같은데? 라고 해서 나중에 복장을 열게 되었다고 한다. 

다행히 복장은 도굴 피해를 보지 않았으니 그에서 이 불상을 누가 언제 어떤 이유로 만들어 봉안하게 되었는지가 드러났으니, 한씨韓氏라는 돈 좀 있는 여성이 먼저 저 세상에 간 남편 숭록대부崇錄大夫 나업羅業이 극락왕생하기를 기원하며 갑오년甲午年 8월 29일 금강산 안양암에 안치했다는 내용이었다. 
 

보광사 목조 지장보살 좌상이다. 나무를 깎아서 만들었고 앉은 지장보살 모습을 구현했다 해서 이리 이름한다. 금치를 해 놓으면 그 재료가 나무인지 금속인지 알기 힘들다. 손꾸락으로 두들겨 봐야 한다. 아니면 금박 떨가져 나간 지점 살펴 보거나. by 속초시립박물관

 
 
이 갑오년이 언제인지는 저 숭록대부 나업이 누구인지를 파악해야 했으니, 조사 결과 임진왜란 와중인 1596년에 태어나 1654년, 향년 59세로 사망한 이로, 광해군 시절인 17세에 내시부에 들어가 인조 효종 시대에 출세하고 최고 관직이 내시 우두머리인 상선尙膳까지 역임했다. 
 

이것도 발원문이 묘하다. by 김주용

 
 
승정원일기 인조 27년 기축(1649) 5월 7일(을축)에는 창덕궁 희정당에서 병세가 위급한 인조를 세자 이하가 알현한 일을 정리했으니, 

세자가 앞으로 나아가 묻기를,

“소신은 누구입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가 비록 병이 들었으나 어찌 너를 모르겠느냐. 너는 세자이다.”

하였다. 대군이 다시 묻기를,

“소신은 누구입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너는 인평(麟坪)이다.”

하였다. 내관 나업(羅業)이 나아가 엎드려 아뢰기를,

“소신은 누구입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너는 바로 나업이다.”

하였다. 4경 이후에 상의 증후가 조금 안정되고 이어 침수에 들었는데 코를 고는 소리가 들렸다. 세자가 영을 내리기를,
“대신들은 늙고 병든 사람인데 한데에서 밤을 새운다면 혹 몸을 상할까 걱정된다. 물러나 쉬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다. 세 제조가 선화문(宣化門) 밖으로 물러 나갔다. 때는 이미 파루(罷漏)였다.
 

이걸 보면 한글 복장물이 있음을 본다. 점점 더 땡긴다. by 김주용

 
이에서 나업이 어떤 위치를 차지하는지가 드러난다. 그만큼 오래도록 인조를 보필한 까닭이었다. 

내친 김에 이렇게 고비를 넘긴 인조는 대략 40일 뒤인 1649년 6월 17일, 향년 53세로 창덕궁 대조전에서 숨을 거두고 만다. 

나업은 부인과 더불어 양주시 장흥면 지금의 청주한씨 묘역에 합장되고 그 무덤이 현존한다는데 어쩌다 마누라 집안 묘역으로 가게 되었는지 궁금한데 이것이 장가간 내시들 보통 패턴인지는 모르겠다. 

이런 나업 행적이 드러남으로써 그의 부인 청주 한씨가 이 지장보살을 만들어 안양암에 봉안한 갑오년은 자연스럽게 1654년 효종 5년으로 밝혀진다. 
 

현대에서 가까운 어느 지점에 어디다가 넣은 납덩이? 아닌가 하는데 천상 생김이 미륵사 석탑 금덩이 같다. by 김주용

 
속초시립박물관이 14일 개막해 다음달 4월 23일까지 「불상, 마음을 담다」 를 내세우 개최하는 초청 특별전시회는 바로 이 보광사와 그 목조 지장보살이 차지하는 위치를 가늠하기 위한 자리다.

주최 측인 박물관과 보광사는 보광사가 금강산 화암사 안양암에 연원을 두었다는 점을 내세워 개산 400주년임과 속초시 승격 60주년임을 아울러 축하하고자 한다고 한다.

그 주인공은 당연히 지장보살상과 아울러 이 불상에 주민등록을 부여하는 데 결정적인 공을 세운 그 복장유물들이다. 

이번 전시는 이 사찰 회주인 석문 스님이 적극 움직여 성사됐다는 말을 들었다. 작년까지 완주 쪽에서 주로 활동하다 20여 년 만에 보광사로 복귀했다고 한다.

보광사는 50~60년대 서울 광장시장에서 큰돈을 번 '이묘련화李妙蓮華'라는 분이 불사를 해서 오늘에 이른 것으로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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