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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S & THESIS

서울 국립박물관을 장식하는 월악산 월광사지 원랑선사탑비, 현지엔 복제비만 덜렁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23. 3.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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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복제지만…' 원랑선사탑비 102년만 고향 왔다
권정상  / 2023-03-10 10:31:01
제천 의림지역사박물관 광장서 복제비 제막식 열려
 
https://k-odyssey.com/news/newsview.php?ncode=179567591541718 

 

′비록 복제지만…′ 원랑선사탑비 102년만 고향 왔다

(제천=연합뉴스) 권정상 기자 = 보물 제360호 월광사지 원랑선사탑비가 복제비의 모습으로 102년 만에 고향인 충북 제천으로 돌아왔다.제천시는 10일 의림지역사박물관 광장에서 김창규 시장, 엄

k-odyssey.com

 
 
이에서 다루는 월광사月光寺라는 사찰은 사지寺址라는 부속어가 말해주듯이 그 터만 남았고, 그 현장에는 그것을 계승했다고 주장하는 이렇다 할 유산이 없다. 더 유감스럽게도 나는 저 월광사 터라는 데를 밟아 본 적 없기에 그 사정을 내가 더 더구나 알 수는 없는 노릇이다. 

다만 그 월광사 족적을 증언하는 우뚝한 유물이 국립중앙박물관 전시실 1층 중앙홀을 장식하고 있으니, 왜 이 막대 막중한 석조유산이 본래 자리도 아니요, 그렇다고 그에서 인접한 다른 곳도 아닌 서울 박물관 실내라는 점이 볼수록 어처구니없기 짝이 없다. 

그런 아쉬움 때문인지, 아니면 그것을 어느 정도는 달래려 한 소산인지는 알 수는 없지만, 실물이 너무나 멀쩡한 해당 유산을 서울에 그대로 놔 둔 채 현장과는 관련이 썩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썩 있다고도 하기 힘든 의림지박물관 뜰에다가 복제비를 만들어 세웠는지 알다가도 모르겠다. 

 

각지에서 뽑아다 놓고 돌려주지 아니하는 석조물들, 사진은 나주 석등인데 이건 아마 나주박물관으로 옮겼을 것이다. 박물관이 아니라 여건만 된다면 본래 자리로 가야 한다.

 
 
물론 의림지박물관이 저 유산이 본래 있던 그 월광사 터를 관할하는 충북 제천시이고, 의림지박물관이 그 시립박물관이라는 특수성을 내가 모르는 바 아니나, 저리할 거 같으면 아예 나는 그 반환을 중앙정부에 대고 정식으로 요청해서 그 요구를 관철하는 일이 좋다고 보는 까닭이다. 

물론 중앙정부, 특히 국립박물관에서는 저와 같은 요구를 단숨에 쌩깔 것이다. 그런 방식으로 자기네 왕국을 유지했고, 그런 자세는 요지부동일 것이다. 불국사 재산인 무구정광다라니경도 안 내놓으려 갖은 애를 쓴 그들이 중앙정부에 대해서는 아무런 힘도 없는 제천시 말은 코로 듣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기왕 그럴거면 수단방법 가리지 말고 실물 가져와서 그것이 본래 있던 월광사 터가 정비되는 그 시절에 갖다 놓기로 하고, 임시방편으로 의림지박물관에다가 모시고 오는 편이 백배 낫지 않겠는가? 

지역사회는 이를 위해 싸워야 한다. 나처럼 서울서 쳐박혀 입만 나불대는 사람이 무슨 절실절박성이 있겠는가?

정작 현지 혹은 현지와 관련 있는 지자체에는 복제물을 만들어 세우고 실물은 중앙정부가 박물관에 틀어쥐고 내놓지 아니하는 사례가 한둘이오만, 저와 아주 흡사한 데가 원주 거돈사지 원공국사부도탑이다.

통일신라시대 혹은 고려시대 그 절의 개창 혹은 중창과 관련 있는 국사國師나 왕사王師는 보통 그 행적을 기록한 탑비와 그 사리를 안치하는 산소인 부도가 세트로 건립하거니와 그런 전통이 거돈사라고 다를 바는 없어, 이 절을 있게 한 절대의 공신인 원공국사 또한 그런 세트가 본래는 거돈사에 있었다. 

절은 폐기된 지 오래고 현장에는 각종 건물터와 삼층석탑, 그리고 원공국사탑비가 우람하게 남아 과거의 영화를 증언한다.

그 절터 뒤쪽 후미지만 한 눈에 절터 전체를 조망하는 언덕배기에 본래 그의 부도탑은 있었지만 일찍이 식민지시대에 반출되어 유전하는 곤란을 겪다가 지금 그 실물은 국립중앙박물관 야외에 있다. 

 

거돈사지 원공국사탑비

 
 
그것이 본래 자리한 현장에는 유홍준 문화재청장 시절에 현지의 반환욕구를 잠재우고자 해서 급하게 화강암 기계로 깎아 세운 복제물이 들어섰을 뿐이다. 

원공국사탑이건, 원랑선사탑이건 현지로 돌아가야 한다. 그것이 본래 있던 자리인 까닭이며, 그 본래하는 자리에 서야 그것이 더욱 빛이 나기 때문이다. 이에는 이론이 있을 수가 없다.

다만 월광사지의 경우는 내가 직접 보지는 아니했지만, 그 터가 아무런 정비도 없이 아마도 그 땅은 사유지가 아닐까 싶은데, 그런 가운데서도 그 명성을 증언하는 석조물만이 나뒹구는 형편이거니와
그 절터 구역은 국비 혹은 지방비로 매입하고 그것을 발굴조사한 다음에는 정비하고서는 탑비를 현지로 당연히 모시고 와야 한다.

물론 열악한 자치단체 재정 사정을 고려할 때, 또 아마도 지방문화재조차 그 터가 지정되지 않고 있는 것으로 알거니와, 그 땅조차 지자체가 매입할 근거도 없고 돈도 없을 것이므로, 그렇다 해서 이를 위한 그 어떤 이렇다 할 움직임도 없이 덜렁 복제비부터 만들어 세운 일은(혹 그렇지 않은지는 몰라도) 영 선후가 바뀐 듯한 느낌을 준다. 

월광서 터 현황은 아래 첨부하는 기사에서 비교적 자세하게 보이니 참고 바란다. 

 
https://m.ohmynews.com/NWS_Web/Mobile/at_pg.aspx?CNTN_CD=A0000424318#cb 

 

월악산은 신라시대 월암산으로 불렸다

[월악산 국립공원 취재기 ⑮] 월암산

www.ohmy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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