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探古의 일필휘지

타는 목마름으로, 고기를 갈망한 이규보

by taeshik.kim 2023. 5.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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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허, 고기를 내오지 못할까>

예전에도 한 번 말한 듯한데 이규보 선생님은 육식파였다. 소고기만 보면 먹지 않을 수 없었고 술안주로 기린을 구워먹고 싶다고 했었을 정도니까.

그렇지만 가난뱅이 하급 관료가 고기를 먹을 일이 얼마나 있었을까. 대개는 그림의 떡이었으리라.


오늘 먹을 고기를 내일로 미루지 말라



그래서였을까, 그는 전주에 있으면서 고기도 제대로 못먹는 울분을 토해내는 글을 하나 남겼다.


삼가 채소ㆍ과일과 맑은 술의 제수로써 성황대왕城隍大王의 영전에 제사 지냅니다. 제가 이 고을에 부임하여 나물 끼니도 제대로 계속하지 못하는데, 어떤 사냥꾼이 사슴 한 마리를 잡아 와서 바치기에 내가 그 이유를 물었더니, 그가 ‘이 고을에는 예부터 매월 초하루에 저희들로 하여금 사슴 한 마리와 꿩 또는 토끼를 바쳐 제육祭肉에 충당하게 하고, 그런 뒤에 아리(衙吏, 아전)들이 공봉公俸을 받아서 주찬酒饌을 갖춰 성황에 제사를 지내는 것이 곧 하나의 관례가 되어 왔습니다.’ 하기에, 제가 노하여 매질하면서 꾸짖기를 ‘네가 어찌 나에게 알려 허락도 받지 않고 이런 짓을 하느냐. 무릇 제 고을의 선물 꾸러미나 청탁 고기를 거절하지 않고, 산의 살찐 노루나 매끈한 토끼와 곰 발바닥, 코끼리 발가락과 바다의 상어ㆍ숭어ㆍ메기ㆍ잉어와 새벽 비둘기, 야생 고니 등 맛난 음식을 불러들여 수두룩 앞에 쌓는 자들이야 차마 그 진미를 홀로 다 먹을 수 없어서 대왕에게 바치는 것이 마땅하겠지만, 어찌 나물 끼니로 가난하게 지내는 나로서 달마다 생물을 죽여 귀신을 살찌게 하기 위해 내 자신의 죄를 더하겠는가. 그리고 귀신도 정직한 귀신이라면 나에게 이런 것을 바라지 않으리라.’ 하고는, 곧 아리들에게 훈계하여 이제부터는 다시 고기를 쓰지 않기로 하고 채소ㆍ과일과 주찬 따위의 진설은 알아 하게끔 맡겼습니다. 제 약속이 이러하니, 대왕은 어떻게 생각할는지 모르겠으나, 바라건대 너그럽게 나를 완악하여 옛 관례를 따르지 않는다 하지 마시오.

- <동국이상국집> 전집 권37, 애사哀詞ㆍ제문祭文, "신에게 제사지내는 글[祭神文] - 전주全州에서 성황城隍에 제사 지내는 치고문致告文인데 운韻이 없다."



꽃등심




"나도 못 먹는 고기를 뭐? 한 달에 한 번 저 성황신인지 뭔지에게 갖다준다고?"라고 생각하는 우리 친구 이규보 아저씨의 모습이 훤히 그려진다.

아마도 이때 성황신뿐만 아니고, 전주의 어지간한 산신이나 강신, 용왕 등등은 채소반찬을 자셔야 했던가 보다.

그런데 그로부터 얼마 안 지나서, 이규보는 자기의 개혁(?) 조치를 철회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저 제문 다음다음 차례 글을 보면...


모년 모월 모일에 모관某官은 삼가 동년(同年, 급제동기)인 진사進士 황민인黃敏仁을 보내어 산록山鹿 한 마리와 맑은 술 등 제수를 갖춰 거듭 마포대왕馬浦大王 영전에 제사 지내노라.


- <동국이상국집> 전집 권37, 애사ㆍ제문, "전주에서 보안현(保安縣, 지금의 부안군) 마포대왕에게 거듭 고하는 제문"


보안현은 지금의 부안 일대로, 아마 거기 '마포'라는 나루터가 있었던 모양이다(마포라고 하니까 지금은 최대포, 곱창, 전골목이 생각나지만 ㅋㅋ).

그런데 그 나루터 신께 제사를 올리면서 이규보는 사슴 한 마리를 통째 바친 것이다. 왜?

이규보의 해명을 들어보자.


... 그런데 그 제사의 진설에 고기를 쓰지 않고 나물만을 갖추었더니 바야흐로 사당을 떠나 말[馬]을 서서히 모는 찰나에, 어떤 사슴이 몹시 당황하여 미친 듯이 날뛰다가 피를 토하면서 죽고 말이 놀라 넘어지니 이것이 해괴한 일이라, 이리저리 생각해 보건대, 아니 귀신이 그 제사에 내가 고기를 쓰지 아니했기 때문에 그런 것인가. 아니면 그 보답에 대한 사례의 인사가 늦었다 해서 나를 깨우쳐 주는 것인가. 어쨌든 제수를 희생으로 바꾸는 것이 좋을 듯해서 사람을 사당에 보내어 잔을 드리노니, 그, 흠향하여 나를 나무라지 말기를 바라는 바이오.


그러니까 정리하면, 이규보가 나물만 올려 제사를 지내니까 온갖 해괴한 일이 일어났다. 곰곰이 따져 보니 아무래도 이건 귀신이 반찬투정을 하는 게 아니면 뭔가 수틀려서 몽니를 부리는 거라는 데 생각이 닿았고, 그래서 "어쨌든"이라는 단서를 붙여 사슴(인지 노루인지 고라니인지) 한 마리를 부랴부랴 제수로 쓴 것이다.

아무리 고려 사회에서 불교 세가 강했다고는 해도, "꼬기"에 대한 갈망은 예나 지나 크게 다르지 않았던가 보다.

오죽하면 나루터의 신마저 제수로 나물만 올렸다고 짜증을 다 냈을까. 옛말에 기분이 저기압이면 고기앞으로라고 했으니 그 연원이 이렇게 오래되었다.

사슴고기 맛은 어떠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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