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국이상국집을 읽다가>
나야 세상에 나온지 이제 30년 조금 넘었고 술 주자 주력은 당연히 그보다 짧다. 그런데 그 짧은 시간 동안 느낀 점 중 하나는 술은 좀 추워지는 겨울에 마시는 것이 좋더라는 거다.
눈내리는 겨울 밤 운치도 운치려니와, 술이 들어가면 몸에 열이 오르는데 특히나 여름날 진탕 마시면 얼굴에 땀이 흥건해져서 견디기가 힘들어진다. 그러니 오래 술자리를 이어가기엔 겨울이 그나마 제격이다.
난 나만 그런 줄 알았는데, 고려시대에도 술이 들어가면 후끈해져서 따숩게 겨울 밤을 보내는 분이 적지 않았던 모양이다.
어느 겨울날, 우리의 백운거사께서 술상을 봐 놓고 지인에게 술을 따라주었다. 그런데 그 지인이 다름아닌 스님!
"거...안되는데..." 뻘쭘했는지 쭈뼛거리며 술잔을 받는 스님을 보며 이규보 선생님은 이렇게 농담삼아 이야기한다(필자는 머리카락의 있고 없음으로 사람을 놀리거나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함을 분명히 밝힌다).
술은 능히 추위를 막아주나니 酒能防凜冽
속담에 ‘겨울모자’라 이른다네 俗諺號冬冠
그대 같이 머리가 반들댄다면 禿首如吾子
추위를 막지 않을 수 없을진대 能無備禦寒
- <동국이상국집> 전집 권16, 고율시, "겨울에 중[僧]과 술을 마시고 희롱삼아 지어줌[冬日 與僧飮戲贈]"
러시아 사람의 상징과도 같은 게 털 수북한 가죽 모자가 아니던가? 그건 무슨 풍습이 아니라 생존을 위한 방법이라 해야 맞다. 모자를 쓰면 머리를 통해 빠져나가는 열을 막아 체온을 높여주기 때문이다.
머리도 털이니까 우리는 천연 털모자를 갖고 태어났다고 해야할까? 자 그러면 그 반대의 경우는 어떻겠는가? 여름엔 좀 낫겠지만 찬바람 부는 날엔...흠.
또 한 가지, 고려시대엔 "술이야말로 겨울 모자"란 속담이 있었던 모양이다. 없이 살았을 서민들에게 털가죽모자나 비단솜넣고 누빈 모자 같은 건 그림의 떡이었을테고, 그렇다고 아무 준비도 없이 나갈 수는 또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 마시면 머리로 열기가 올라오는 술이라도 좀 먹고 겨울을 날 수밖에.
어쨌건, 이규보 선생은 그 두 가지 이유를 들어 겨울 어느 날 집을 찾아온 스님에게 술을 권했다. 그 스님도 어쩔 수 없었는지 한 잔 들이키고, 또 따라주니 한 잔, 또 한 잔...
그 끝은 알 수 없지만, 분명 술병 하나로 끝나진 않았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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