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다면 왜 무령왕릉은 개봉 당시 부부 위치가 바뀌었고, 머리는 북쪽이 아닌 남쪽으로 두었는가?
이 의문은 실은 역발상으로 간단히 풀리는데, 그것이 죽음의 경우는 반대지만, 살아있는 모습이라는 사실이다.
간단히 말해 무령왕과 그의 왕비 모두 살아있는 모습으로 출현한 것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찌하여 저 부부는 살아있는 모습으로 형상화했는가?
그 해답은 빈殯에 있다.
더 간단히 말해 빈소 그대로의 모습인 까닭이다.
앞서 나는 동아시아 전통 장송 관념에 의하면, 모든 사람은 군주건 나발이건 두 번의 죽음을 맞이하며 이 두 번의 죽음을 거쳐야 비로소 죽음이 완성한다는 말을 했다.
예서 관건이 빈殯이다.
이 빈이란 더 간단히 말하면 생물학적 죽음과 상징으로서의 죽음이 걸치는 기간을 말한다.
완전한 죽음은 저 두 번째 죽음, 곧 상징으로서의 죽음으로서 비로소 완성한다.
그렇다면 빈殯에 모신 분, 곧 생물학적 죽음을 맞지한 분은 어찌 취급되었는가?
놀랍게도 여전히 살아있는 것으로 간주되어, 살아있는 모습으로 형상화했다.
살아 있는 사람은 부부의 경우, 왼쪽(곧 동쪽)을 더 높은 것으로 간주해서 남자가 왼쪽에 위치하고 그 반대편 오른쪽, 그러니깐 서쪽에 부인이 위치한다. 조선시대 삼정승 중 좌의정이 우의정보다 높은 이유가 바로 이에서 말미암는다.
머리는 죽어서야 북쪽에서 남쪽을 향해 두지만, 살아서는 남쪽에 둔다.
이제 우리는 무령왕릉의 무령왕과 그 왕비가 바로 빈전 상태로 안치한 그대로 상징적인 죽음까지 맞이했음을 알았다.
더 간단히 말해 저 무덤은 그대로 빈전이었다.
물론 우리가 말하는 빈전 곧 빈소는 죽음 직후 한달 혹은 몇달 동안은 왕궁 어딘가에 마련되었을 테고, 거기에서 상주는 조문객을 맞이했겠지만, 이내 지금의 무령왕릉으로 시신은 옮겨졌다.
그렇게 무덤으로 들어간 무령왕과 그 왕비는 3년(실제는 27개월)이라는 거상居喪을 지나면 탈상脫喪이라 해서, 모든 장송 절차가 끝나면서는 방향을 바꾸어 무령왕은 오른쪽(서쪽), 왕비는 그 왼쪽(동편)에 위치하고, 머리는 북쪽으로 돌려야 했지만, 이 절차를 생략했다.
따라서 저 무덤은 곧 저들한테는 빈전이며 빈소이기도 했다.
이를 통해 우리는 무령왕릉을 둘러싼 최대 난제 중 하나를 명쾌히 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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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령왕릉이 봉착한 최대 난제 둘] (3) 빈殯, 죽음으로 가는 마지막 문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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