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쿠자와 유키치라는 메이지 유신기의 저명한 일본의 사상가가 있다.
그의 집안은 메이지유신 이전에는 하급무사로 사무라이 전체로 본다면 한미한 집안에 속했다.
그의 아버지에 대한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다.
후쿠자와 유키치의 아버지는 후쿠자와 햐쿠스케(百助)라는 인물로 번의 회계를 보조하는 한미한 직역을 담당하는 하급번 관리였는데 (사실 이런 직역은 한국사에서는 아전이나 다름 없다)
단순히 하급무사-번리였던 것만이 아니라 유학에서는 꽤 이름이 알려진 사람이었던 모양이다.
다만 후쿠자와가 속한 번은 워낙 신분차별이 엄격하여 아무리 학문적 명망이 높아도 도통 이를 알아주는 사람이 없었고,
그렇게 일생을 전전하다가 세상을 떴다는 것이다.
후쿠자와 햐쿠스케의 아들인 유키치는 일찌기 그의 아버지에 대해 이렇게 일갈한 바 있었다.
「門閥制度は親の敵(かたき)で御座る」(『福翁自伝』)
문벌제도라는 것은 우리 아버지의 원수였다는 것이다.
막말지사와 메이지유신기의 명사들을 보면 이렇게 유신 이전의 막번체제에 대해 격렬한 반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는데
가장 큰 이유는 자신들이 가진 능력에 비해 고급무사들이 과대한 평가를 받고 자신들은 단지 하급무사라는 이유로 제대로 등용되지 못하고 있다는 자각이었다.
이 부분이 바로 우리가 일본사를 깊이 알지 못하면서 오해를 낳는 부분이라고 할수 있는데,
메이지유신의 동력을 천황에게 권력을 돌리는 왕정복고 등으로 단순히 인식하면 안 되며,
메이지유신을 보신전쟁까지 끌고가면서 일본사회를 뒤집어 엎는데까지 진전시킨 가장 큰 원인은 그 바탕에 하급무사의 "한"이 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바로 이런 후쿠자와 유키치 유년의 경험이 바로 그의 '문명개화론'을 낳았는데,
후쿠자와 유키치의 탈아입구론이라고 하면 흔히 조선과 중국 만을 비하하는 표현이라고 한국에서는 해석하는 경우가 많은데,
사실은 이들의 탈아입구의 '탈아'에는 전통 일본사회의 모든것도 포함되어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일본의 경우 근대화의 동력을 능력이 있으면서도 문벌 때문에 인정받지 못하는 하급 무사 계층의 혁명적 발로라고 할 때,
한국사에서는 과연 이에 대응할 만한 세력이 누가 있을까?
당시 한국에도 이런 세력에 조응할 만한 사람들이 분명히 있었을텐데,
갑오전쟁의 주역이었다는 '농민'일까?
독자 여러분들에게 판단을 맡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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