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지 정부는 유신 이후 신불분리령을 통해
이전에는 불교와 뒤섞여 있던 신도를 분리하여 별도의 종교시설화 하는 작업을 하였는데
슈겐도는 여기서 신도의 일종으로 간주되지 않았다.
그렇게 하기에는 슈겐도는 너무 불교 쪽으로 깊이 침투해 있었다고도 할 수 있겠다.
일단 슈겐도는 전통 신도의 이론적 배경이라 할 고사기 등 문헌에 전혀 나오지 않는 데다가
슈겐도 자체가 불교 천태종과 밀교진언종 등에 깊이 결합되어
신도로 분리해 내기 용이하지 않았던 점,
거기에 한 가지를 더 들자면,
슈겐도의 행자들이 즉신성불을 목적으로 수행하고 있다는 점도 문제였겠다.
메이지 정부는 유신 이후 가장 문제가
서구 제국과의 불평등 조약을 개정하는 작업이었다고 할 수 있는데
제국주의 국가들이 일본에서 치외법권 등을 요구하는 명분은
일본의 사법제도와 풍습이 너무 야만적이어서
도저히 문명국으로 봐줄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 때문에 메이지 초기 일본은 이러한 인식을 불식하기 위해 다각도의 문명화 조치를 하여
우리는 야만이 아니다, 문명국이다 라는 것을 보여주고자 했는데
그러한 예의 하나가 바로 지금의 동경 황거 일대를 서양식 건물로 일신하는 것이라던가,
녹명관을 지어 서양 외교관에게 일본이 문명국임을 어필하고자 하는 것 등등이었다.
일본에 왔다가 할복을 하거나 에도시대 방식대로 사형을 집행하는 것을 목격하고
이러한 풍습의 야만성 때문에 치외법권을 요구하지 않을 수 없다는 주장을 서구제국이 계속 하고 있는 터라,
일본으로서는 메이지 이전의 여러 "야만적" 풍습을 일신하지 않을 수 없게 압박받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사람이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여 토굴속에 들어가 입정한 다음
돌아가신 시신을 잘 건조시켜 미라를 만들어 이를 전시하는 즉신불은
당연히 메이지 정부 입장에서 볼 때 없애버려야 할 악습으로 간주되었다.
메이지 정부는 신교분리령 당시 이례적으로
슈겐도 자체에 대해서는 금지령을 내리고 모든 슈겐도 행자들은 환속조치하여
말 그대로 슈겐도라는 종교 자체를 발본색원하였고
즉신불을 법률상 자살로 간주하고
즉신성불하는 것을 돕고 숭배하는 것은 일종의 자살방조에 해당한다고 정의하여
법률적 책임을 부과하는 등 엄중하게 대처하여
메이지유신 이후 즉신성불을 목적으로 하는 수련은
사실상 전혀 불가능하게 되어 그 맥이 끊어져 버렸다.
따라서 현재 남아 있는 일본의 즉신불은 거의 모두 에도시대의 것으로,
메이지유신 이후에 해당하는 것은 단 1례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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