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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라 이야기: 신동훈 & 김태식/1-슈겐도와 일본 미라 이야기

[슈겐도와 일본 미라 이야기] (23): 신불분리와 슈겐도의 수난

by 초야잠필 2025. 1.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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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불운동은 사실 일본만이 아니라 동양사에서 여러 차례가 있었다.

중국에서도 전국적으로 광풍이 몰아친 유명한 폐불운동이 두어 차례 있었고, 

한국도 조선왕조의 건국 자체가 일종의 폐불운동이라 할 수 있겠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일본은 불교전래 후 불교의 재래종교에 대한 우위가 결정되면서

오랫동안 불교를 주, 토착신앙을 종으로 하는 신불습합이 이루어져 있었는데 

이러한 상황이 에도시대 국학연구가 활발해지면서 변하기 시작하였다는 말을 하였다. 

그리고 메이지 유신이 일어난 후, 

결국 신정부는 신도와 불교를 나누어 구분하는 신불분리神仏分離 정책을 선언하게 되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일본의 신사와 불교사원의 모습은 따라서 메이지유신 이후에 시작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메이지신정부는 불교와 신도가 뒤섞인 사원에서 불교적 요소는 불교사원이 유지하되 

신도의 요소는 모두 신사에게 양도하여 둘을 확실히 나누고자 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단순한 신불분리가 아니라 불교자체를 공격하는 훼불운동까지 나타나게 되었다. 

메이지 시대의 이러한 훼불운동은 아마도 고대일본에서 불교 공인 이래 거의 최초의 사건이 아닐까 하는데 

백제로부터 불교를 전래 받은 후 이미 1400년간 일본인의 정신 세계를 지배한 불교를 배척한 충격은 상당히 컸다고 할 수 있겠다.

메이지 신정부의 신불분리 정책 당시 공격당한 불교사원의 불상들. 모두 목이 달아나 있다. 조선시대 불상을 연상시킨다.


이런 와중에 슈겐도는 엄청난 타격을 받았다. 

사실 신불분리정책으로 일본의 고유한 신앙체계를 대표하는 신도는 국가종교로 일약 도약하면서 

불교에 눌려 있던 부진을 극복하고 상당한 세력을 회복하였다고 할 수 있는데 

슈겐도는 이러한 흐름을 제대로 타지 못하고 오히려 극도의 박해를 당했다. 

메이지신정부로서는 불교에 대한 공격 자체는 원래 의도한 것은 아니었다고도 할 수 있는 측면이 있는데

슈겐도에 대해서 만큼은 노골적으로 이를 박해하여 

슈겐도 자체를 금지하고 그때까지 슈겐도를 수련하던 행자들을 모두 환속시켜 종교 자체의 대를 끊고자 하였다. 

이 때문에 슈겐도 행자의 일부는 신도로 이탈하여 도망하기도 하였지만

결국 메이지시대 당시 받았던 타격을 극복하지 못하고 쇠퇴하였다. 

왜 슈겐도에 대해서 만큼은 이렇게 집중적인 공격과 함께 금지령까지 내렸을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슈겐도 수련 목적의 최종 목표인 즉신성불-. 

그리고 즉신불 자체가 가지고 있는 대외적 이미지가 큰 역할을 하고 있었다고 본다.

메이지 신정부 당시의 신불분리령. 이는 한마디로 말하면 불교에 뒤섞여 있었던 신도를 이로부터 떼어 내어 일본 고유의 신도로 재탄생시키는 것이었다 할수 있다. 신사와 불교사원으로 나뉘어진 지금의 일본 모습은 고유한 것이 아니라 메이지 신정부에 의해 창조된 모습이다. 이 과정에서 슈겐도는 큰 타격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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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겐도와 일본 미라 이야기] (22): 신불습합과 슈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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