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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와 함께한 나날들

[문화재와 함께한 나날들] (spinoff) 관심이 달랐던 두 실장 김성범과 정계옥

by taeshik.kim 2024. 3.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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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산상성 신라 목간. 정계옥이 집요하게 매달렸다.

 
함안 성산산성 발굴 이야기를 정리하는 김에 아무래도 이 두 사람은 빼놓을 수 없어 따로 정리한다.

둘 다 지독한 업무스타일이라 논란이 많았는데, 이런 사람과 일을 하는 직원은 딱 두 가지로 갈라진다. 그의 심복이거나 반란자이거나. 

결국 이 두 사람은 자기랑 뜻이 맞는 사람과 일을 할 수밖에 없고, 그에서 소외된 사람들은 불만이 팽배하기 마련이라, 비슷한 시대를 살며 비슷한 시대 같은 문화재청과 국립문화재연구소를 일하며 무수한 에피소드를 양산하게 된다. 

내 기억으로 연배는 김성범 소장이 좀 빠를 것이다. 둘은 문화재청 혹은 문화재연구소 전력에서 출신 대학으로 보면 주류가 아니라는 데 또 다른 공동점이 있다.

김성범이 국민대 사학과요, 정계옥은 숭실대 사학과다. 둘 다 고고학도로 알려졌지만 적어도 출신 대학 성분으로 볼 때는 아니었다.

이 두 사람이 어떤 인연으로 문화재청이랑 엮이게 되었는지는 모르겠다.

정계옥의 경우 최병현 선생이 다리를 놓지 않았을까 싶은데, 이 뇐네 정신줄 온전할 때 이건 물어봐야겠다.

연배로 보아 숭실대 출신이기는 하나 한남대 봉직하다 나중에 모교로 잽싸게 갈아탄 최병현보다는 그의 스승 임병태 선생한테 배우지 않았을까 싶기는 하다. 

국민대 사학과는 실상 한국근현대사 연구에서 뚜렷한 족적을 남긴 조동걸 선생이 이력을 뒤져보면 이 양반도 잡탕이라, 60년대 전력을 보면 고인돌 발굴하러 다닌 족적이 많이 보이는데, 혹 그런 데서 고고학과 연이 닿지 않았나 싶기는 하지만 전반으로 보아 그가 나온 국민대 사학과는 유달리 고고학에 관심을 기울인 전력이 없다.

그런 데를 나온 김성범이 어찌하여 연구소에 투신하고 고고학을 하게 되었을까? 요새 연락이 아주 끊어져 언제 기회 닿으면 물어봐야겠다. 


김성범이 집착한 목기


각설하고 이 두 사람이 앞서거니뒤서거니 해서 지금은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로 간판을 바꾼 국립창원문화재연구소에서 학예실장을 지낸 적이 있다.

그때 그 연구소 역점 사업 중 하나가 함안 성산산성 발굴이라, 실무는 훗날 그 소장이 되는 박종익이 도맡아 했다. 

두 사람 실장 전력 선후관계는 지금 기억에 없다. 암튼 두 사람 고고학 성향은 많이 달랐는데, 정계옥은 잡탕밥이었다. 천지사방 제것 아닌 것이 없었다. 이것도 저것도 다 내가 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었다. 
 
 반면 김성범은 일본 고고학 영향을 아주 짙게 받았다. 이른바 신판 친일파인 셈인데, 연구방법론도 그렇고, 실제 그가 불러들인 외국 연구자는 모조리 일본 쪽이었고, 개중에서도 일본고고학 영향인데 목기木器에 대한 관심이 아주 컸다. 

성산산성은 내부에 연못이 있다. 이 연못 터를 발굴했더니 무수한 목기를 건졌다. 목간만 해도 그것이 엄연히 목기의 일종이었다. 

정계옥이 목간에 유별나게 매달린 반면, 김성범은 미친 듯이 목기 타령만 일삼았다. 이것이 훗날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가야문화재연구소가 목기 전문 연구소를 표방하는 밑거름이 된다. 이게 한국문화재사에서는 아주 중요하다. 

가야연구소는 목간 연구 센타이면서 목기 연구 중심이 된 그 역사가 오롯이 저 유별난 두 실장한테서 비롯한다. 

정계옥은 목간 집성집을 냈고 김성범은 목기 집성집을 냈다. 

두 사람을 두고 말이 많겠지만, 또 호오가 극단으로 갈리기는 하지만, 이 점을 한국고고학은 두고두고 대서특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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