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 삼국 중에서도 유독 신라에 대해서만큼은 왕권이 미약하거나 더디게 발달했다는 주장이 횡행한다. 이른바 통설이라 해서 학계 대세를 점한다.
그런 증거 중 하나로 흔히 임금과 신하가 명령을 내릴 적에 같은 '敎(교)'자를 쓴다 해서, 신라시대에는 왕이 초월적인 위치를 점하지 못하지 못했다고 한다.
맞는 말인가?
북한산 신라 진흥왕순수비 첫 대목이다.
(上缺)興太王及衆臣等巡狩管境之時記
(진)흥태왕 및 중신 그리고 기타등등이 순수관경할 때의 기록이다.
같은 진흥왕순수비 중 마운령비 첫 구절이다.
(上缺)眞興太王及衆臣等巡狩□□之時記
순수巡狩란 제왕이 자기 영토를 돌면서 정치가 잘 행해지는지를 살피는 행위다. 관경管境이란 요컨대 국경선이다. 따라서 순수관경巡狩管境이란 국경 일대를 돌면서 나라 안 사정을 살피는 일을 말한다.
예서 우리가 두 눈 부릅뜨고 봐야 하는 대목은 이 문장 동사구인 순수관경하는 주체가 누구냐다. 순수하는 주체는 진흥태왕만이 아니라, 중신衆臣과 기타등등 우수마발[等]도 들어가 있다는 점이다. 순수는 말할 것도 없이 제왕에게 부여된 특권이다.
함에도 신라사람들은 순수하는 주체로서 진흥태왕만이 아니라 중신과 기타등등 관료도 같이 순수했다고 썼다.
그렇다고 해서 신라가 진흥왕시대에 왕권이 확립되지 않았는가?
얼토당토 않은 개소리다.
따라서 왕과 신하가 명령을 내릴 적에 같은 敎라는 글자를 썼다 해서, 왕권이 발달하지 않았거나 미약했다는 주장은 지나가는 소가 웃을 일이다.
신라사람들한테 순수하는 주체로서 오직 왕만이 독립할 필요가 없어서 저리 표현했을 뿐이며, 그렇다고 해서 순수가 제왕이 누리는 특권임을 결코 모르지 않았던 것이다.
www.youtube.com/watch?v=VsYX_rSvSz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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