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암집 제2권 연상각선본煙湘閣選本
홍덕보洪德保 묘지명
덕보德保[홍대용洪大容]가 죽은 지 3일 후에 문객門客 중에 연사年使[동지사]를 따라 중국에 들어가는 사람이 있었는데, 사행길은 응당 삼하三河를 거치게 되어 있었다.
삼하에는 덕보의 친구 손유의孫有義란 사람이 있는데 호를 용주蓉洲라 하였다.
몇 년 전에 내가 북경으로부터 돌아오는 길에 용주를 방문했다가 만나지 못해, 편지를 남겨 덕보가 남쪽 지방으로 원이 되어 나간 사실을 자세히 서술하고 덕보가 보낸 토산물 두어 종류를 남기어 성의를 전달하고 돌아왔다.
용주가 그 편지를 떼어 보았다면 응당 내가 덕보의 벗인 줄을 알았을 것이다.
그래서 그 문객에게 부탁하여 다음과 같이 부고를 전하게 했다.
“건륭乾隆 계묘년(1783) 모월 모일 조선 사람 박지원은 머리를 조아리며 용주 족하足下에게 사룁니다.
폐방敝邦[우리나라] 전임 영천 군수榮川郡守 남양南陽 홍담헌洪湛軒 휘 대용大容 자 덕보가 올해 10월 23일 유시酉時에 영영 일어나지 못했습니다.
평소에는 병이 없었는데 갑자기 중풍으로 입이 비틀리고 혀가 굳어 말을 못 하다 잠깐 사이에 이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향년은 53세입니다.
고자孤子[부친상 중의 아들] 원薳은 가슴을 치며 통곡하고 있어 제 손으로 부고를 써서 전할 수도 없거니와, 양자강揚子江 남쪽에는 편지를 전할 길이 없습니다.
이 부고를 오중吳中으로 대신 전달해서 천하의 지기知己들로 하여금 그가 죽은 날짜를 알도록 해 주어, 망자나 산 자나 족히 한이 없도록 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 문객을 보내고 나서 나는 항주杭州 인사들의 서화와 편지 및 시문詩文들 총 10권을 손수 점검하여 관 옆에 벌여 놓고, 관을 어루만지면서 통곡하며 이렇게 말하였다.
아! 덕보는 통명通明하고 민첩하고 겸손하고 단아하며, 식견이 깊고 견해가 정밀하였다.
특히 음률과 역법曆法에 뛰어났으니, 그가 만든 혼의渾儀 제기諸器는 오래오래 깊이 생각한 끝에 새롭게 기지機智를 짜낸 것이었다.
처음에 서양인들은 땅이 구형球形임을 설명하면서도 땅이 돈다는 말은 하지 않았는데, 덕보는 일찍이 논하기를 땅이 한 번 돌면 하루가 된다 하였다.
그 설이 미묘하고 심오하였으나, 다만 미처 그에 대해 저술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그의 만년에는 땅이 돈다는 것을 더욱 자신하여 의심이 없었다.
세간에서 덕보를 흠모하는 사람들은 그가 일찌감치 스스로 과거를 폐하고 명리名利에 뜻을 끊고, 한가히 들어앉아 이름난 향을 피우고 거문고와 가야금을 타는 것을 보고서, 그가 장차 담담히 스스로 즐기며 속세에서 벗어나는 데 오로지 뜻을 두려나 보다 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덕보가 만물을 종합하고 정리해서 아무리 복잡한 것도 단호히 처리하여, 나라의 재정을 맡길 만도 하고 먼 외국에 사신으로 보낼 만도 하며, 군대를 통솔하는 기발한 책략을 지녔다는 것을 전혀 알지 못했다.
그는 유독 남들에게 혁혁하게 과시하는 것을 기뻐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두어 고을을 다스리면서도, 문서를 신중히 처리하고 정령政令을 기한 내에 집행하는 데 앞장섬으로써 아전들은 설치지 않고 백성들은 절로 따르게 한 데에 지나지 않았을 따름이다.
일찍이 그의 숙부가 서장관書狀官으로 가는 데 수행하여, 육비陸飛와 엄성嚴誠과 반정균潘庭筠을 유리창琉璃廠에서 우연히 만났다.
이 세 사람은 다 같이 전당錢塘에 거주하며, 모두 문장과 예술의 선비여서 그들이 교유하는 사람들도 중국 내의 유명 인사들이었다.
그런데도 모두 덕보를 추앙하여 대유大儒로 여겼다.
이들과 더불어 필담한 것이 누만언累萬言으로, 유교 경전의 뜻과 천인성명天人性命과 고금古今의 출처대의出處大義를 분석하였는데, 굉장하고 뛰어나서 즐거움을 이루 다 말할 수 없었다.
급기야 작별하는 마당에 다다르자 서로 바라보며 눈물을 흘리면서,
“이 한 번 이별로 그만이구려! 저승에서 서로 만나도 부끄러움이 없게 살기를 맹세합시다.”
하였다.
엄성과는 더욱 서로 마음이 맞아서, 군자가 세상에 나서거나 숨는 것은 시대에 따라야 하는 것임을 살짝 깨우쳤더니, 엄성은 크게 깨달아 남쪽으로 돌아갈 것을 결심하였다.
그 후 두어 해 만에 그가 민중閩中에서 객사하자 반정균이 편지를 써서 덕보에게 부고하였다.
덕보는 애사哀辭를 짓고 예물로 향을 갖추어 용주에게 부쳐 마침내 전당으로 들어가게 되었는데, 전달된 그날 저녁이 바로 대상大祥[2주기 제사] 날이었다.
제사에 모인 이들은 서호西湖 주위 여러 고을 사람들이었는데, 모두들 경탄하면서 이는 지극한 정성으로 혼령을 감동시킨 결과라고 일렀다.
엄성의 형 과果[이름이다]가 예물로 보낸 향을 사르고 그 애사를 읽은 뒤 초헌初獻을 하였다.
아들 앙[昻, 이름이다]은 편지를 보내 덕보를 백부伯父라 칭하면서 그의 아버지 철교鐵橋[엄성의 호]의 유집遺集을 보냈는데, 돌고 돌아 9년 만에 비로소 받아보게 되었다.
그 문집 속에는 엄성이 손수 그린 덕보의 작은 초상화가 있었다.
엄성이 민중에 있을 때 병이 위독하였는데도 덕보가 증정한 조선 먹을 꺼내 향내를 맡고 가슴에 얹은 채 죽었다.
마침내 그 먹을 관에 함께 넣었다.
오하吳下 사람들은 이 사실을 널리 알리면서 특이한 일로 여기어 다투어서 시와 산문을 지었는데, 주문조朱文藻라는 이가 편지를 부쳐 와 그 상황을 이야기했다.
아! 그는 세상에 살아 있을 때에도 이미 비범하기가 마치 옛날의 특이한 사적 같았다.
벗으로서 지성至性[선량한 천성]을 지닌 이라면 반드시 그 일을 널리 전파하여 비단 이름이 양자강 남쪽 지방에 두루 알려질 뿐만이 아닐 터이니, 구태여 내가 그의 묘지墓誌를 짓지 않더라도 덕보의 이름을 불후不朽하게 할 것이다.
부친은 휘가 역櫟이니 목사牧使요, 조부는 휘 용조龍祚니 대사간이요, 증조는 휘 숙璛이니 참판이요, 모친은 청풍 김씨淸風金氏로 군수 방枋의 따님이다.
덕보는 영조 신해년(1731)에 태어났다.
음직蔭職으로 선공감 감역繕工監監役에 제수되었으며, 곧 돈녕부 참봉으로 옮겼으나 세손익위사 시직世孫翊衛司侍直으로 고쳐서 제수되었다.
사헌부 감찰로 승진하고 종친부 전부宗親府典簿로 전직했으며, 태인 현감泰仁縣監이 되어 나갔다가 영천 군수로 승진하고는 두어 해를 있다가 모친이 연로하다는 이유로 사임하고 돌아왔다.
부인은 한산韓山 이홍중李弘重의 따님으로 1남 3녀를 낳았다.
사위는 조우철趙宇喆·민치겸閔致謙·유춘주兪春柱다.
그해 12월 8일에 청주淸州 모 좌坐의 벌에 장사 지냈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명은 원고를 잃었다]
[주-D001] 삼하(三河) : 하북성(河北省) 삼하현(三河縣)에 속한 고을로, 이곳과 통주(通州)를 거치면 곧 북경에 당도하게 된다.
[주-D002] 손유의(孫有義) : 거인(擧人)으로, 자를 심재(心栽)라고 하였다. 북경에서 귀환하던 홍대용과 1766년 음력 3월 초에 만나 필담을 나눈 것을 계기로, 이후 10여 년간 서신을 통해 교분을 이어 갔다. 《간정동회우록(乾淨衕會友錄)》에는 홍대용이 그에게 보낸 편지 6통이 수록되어 있다. 《湛軒書 外集 卷1 杭傳尺牘》
[주-D003] 몇 년 …… 것이다 : 《열하일기》 관내정사(關內程史)에 관련 기사가 있다. 1780년 음력 7월 30일 연암은 삼하에 있는 자택으로 손유의를 찾아갔으나, 그가 부재중이라 홍대용의 편지와 선물만 전하고 떠났다고 한다. 당시 연암이 전한 홍대용의 편지가 《간정동회우록》에 ‘여손용주서(與孫蓉洲書)’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는데, 그 편지에서 홍대용은 자신이 연초에 태인 현감(泰仁縣監)에서 경상도 죽령(竹嶺) 남쪽 고을인 영천(榮川)의 군수로 영전(榮轉)된 사실을 전하고, 아울러 그에게 연암을 문장과 품망(品望) 면에서 자신의 외우(畏友)라고 소개하면서 이번에 사행에 나선 연암 편에 이 편지를 부친다고 하였다.
[주-D004] 오중(吳中) : 항주(杭州)가 있는 절강성(浙江省) 북부 일대를 가리킨다. 오하(吳下)라고도 한다. 《중편연암집》에는 ‘越中’으로, 《여한십가문초(麗韓十家文鈔)》에는 ‘浙中’으로 되어 있다.
[주-D005] 시문(詩文) : 《운산만첩당집》에는 ‘文獻’으로 되어 있다.
[주-D006] 혼의(渾儀) 제기(諸器) : 《담헌서(湛軒書)》 외집(外集) 권6 농수각의기지(籠水閣儀器志)에 혼의의 옛 제도를 개량하고 서양의 방법에 정통하여 새롭게 만들었다고 소개한 통천의(統天儀)ㆍ혼상의(渾象儀)ㆍ측관의(測觀儀)ㆍ구고의(句股儀) 등의 천문의기(天文儀器)를 가리킨다.
[주-D007] 서장관(書狀官)으로 가는 데 : 원문은 ‘書狀之行’인데, 《여한십가문초》에는 ‘書狀使燕之行’으로 되어 있다.
[주-D008] 일찍이 …… 만났다 : 홍대용은 1765년(영조 41) 동지사의 서장관인 숙부 홍억(洪檍)을 따라 북경에 갔다. 유리창(琉璃廠)은 골동품ㆍ서화ㆍ서적ㆍ문방구 등을 파는 북경 선무문(宣武門) 밖의 유명한 상가(商街)이다. 그 이듬해 음력 2월 일행 중 비장(裨將) 이기성(李基成)이 과거 응시차 상경한 엄성(嚴誠)과 반정균(潘庭筠)을 유리창에서 우연히 알게 된 것을 계기로, 홍대용이 간정동(乾淨衕)에 있던 그 두 사람의 숙소로 여러 차례 방문하여 장시간 필담을 나누었으며, 뒤늦게 상경한 그들의 친구 육비(陸飛)까지 사귀게 되었다. 육비ㆍ엄성ㆍ반정균 3인에 대해서는 《담헌서》 외집 권3 건정록후어(乾淨錄後語)에 자세히 소개되어 있다.
[주-D009] 전당(錢塘) : 절강성 항주부(杭州府)에 속한 현(縣)이다.
[주-D010] 그런데도 …… 여겼다 : 엄성과 반정균은 홍대용이 주자학에 정통하다고 하여 그를 ‘이학대유(理學大儒)’라고 극구 칭찬했다고 한다. 《湛軒書 外集 卷3 乾淨衕筆談續 2月 23日》
[주-D011] 천인성명(天人性命)과 고금(古今)의 출처대의(出處大義) : 천인성명은 천도(天道)와 인사(人事)의 관계, 인간의 본성과 운명에 관한 철학적 논의를 뜻한다. 고금의 출처대의란 벼슬하거나 은거할 때를 올바르게 판단해서 처신하여 후세의 귀감이 될 만한 역사적 사례를 뜻한다.
[주-D012] 그 후 …… 객사하자 : 민중(閩中)은 복건성(福建省)을 이른다. 엄성은 정해년(1767) 봄에 복건성으로 가서 가정 교사를 하다가 학질에 걸려 귀향한 뒤 그해 겨울에 병사하였다. 《淸脾錄 卷2 嚴鐵橋》
[주-D013] 애사(哀辭) : 대개 요절한 경우에 짓는 추도사를 이르는데, 여기서는 《담헌서》 외집 권1에 실린 ‘엄철교에 대한 제문〔祭嚴鐵橋文〕’을 가리킨다.
[주-D014] 서호(西湖) : 절강성 항주에 있는 유명한 호수로, 서자호(西子湖)ㆍ전당호(錢塘湖) 등으로도 불린다.
[주-D015] 아들 …… 되었다 : 엄앙(嚴昻)이 홍대용을 백부라 칭한 것은, 홍대용이 엄성과 결의형제(結義兄弟)하였으며 엄성보다 한 살 위였기 때문이다. 철교(鐵橋)의 유집(遺集)이란 엄성의 벗인 주문조(朱文藻)가 편찬한 《소청량실유고(小淸涼室遺稿)》를 이른다. 《乙丙燕行錄 附錄》 소청량실(小淸涼室)은 엄성의 서실 이름이다. 손유의는 이 책과 엄성의 초상화를 맡아 두었다가, 1778년 사행차 북경에 왔다 돌아가던 이덕무 편에 전달하였다. 《靑莊館全書 卷67 入燕記下 6月 17日》
[주-D016] 오하(吳下) : 《중편연암집》에는 ‘越中’으로, 《여한십가문초》에는 ‘浙中’으로 되어 있다.
[주-D017] 주문조(朱文藻) : 호를 낭재(朗齋)라고 하며, 육서(六書)와 금석(金石)에 정통했다. 엄성·육비·반정균 3인과 홍대용 등 조선 사행 6인이 주고받은 시와 편지를 편찬한 《일하제금집日下題襟集》에 서문을 썼다.
[주-D018] 명(銘)은 ……잃었다 : 《과정록》 권1에는 홍대용이 죽었을 때 연암이 지었다는 다음과 같은 뇌사誄辭가 소개되어 있다. “서호에서 서로 만난다면, 그대는 날 부끄러워하지 않을 줄 아노라. 죽어서 입에 구슬 물지 않았으니, 도굴꾼 같은 타락한 선비를 공연히 딱하게 여겼도다.〔相逢西子湖 知君不羞吾 口中不含珠 空悲詠麥儒〕” 이는 다름아닌 ‘홍덕보 묘지명’의 상실된 명사(銘辭)로 추측된다. 한편 연암 후손가에 소장되어 온 《연암집》 산고에는 “宜笑舞歌呼 相逢西子湖 知君不羞吾 口中不含珠 空悲詠麥儒”라고 하여 ‘宜笑舞歌呼’ 5자가 추가된 명사가 있었다고 하며, 연암 후손가에 소장되어 온 《열하일기》에도 “魂去不須□ 想逢西子湖 口裏不含珠 怊悵詠麥儒”라는 명사가 적혀 있었다고 한다.
ⓒ 한국고전번역원 | 신호열 김명호 (공역) | 2004(전재는 이 번역을 아주 약간 손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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