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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AYS & MISCELLANIES

발굴보고서 발간 법제화가 초래한 변화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21. 3.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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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부른 주동세력은 첫째, 국립박물관 둘째, 대학박물관이었다. 


국립박물관은 그 중요한 경주 조양동 유적을 파고도 30년 이상 보고서를 내지 않았다. 비단 조양동 뿐인가? 단 한 군데도 제대로 보고서를 낸 데가 없었다. 

 

경북 김천시 구성면 송죽리松竹里 유적. 1991년 계명대박물관 조사 결과 신석기시대와 청동기시대 취락 유적으로 밝혀진 것으로 계명대박물관이 2008년에서야 발굴보고서를 냈다. 이를 주도한 이가 김권구. 그 자신은 간여도 하지 않은 이 발굴보고서를 대단한 뚝심으로 밀어붙여 보고서를 냈다.


대학박물관은 더 했다. 그 옛날 통장 관리를 교수놈들이 개인 통장으로 할 때라, 발굴비는 지가 다 삥땅 쳐서 고급 승용차 굴리고, 아파트 사고 부동산 투자할 때라, 막상 발굴이 끝나고 나면 나몰라라, 유적 유물 정리가 하세월이었으니, 모든 대학박물관이 이 꼴이었다. 


이 꼴은 더는 보지 못한다 해서 내가 칼을 뺐다. 틈나는 대로 조졌다. 그랬더니, 그런 빚을 진 자들이 다 이따우 소리를 해댔다. 


"연구도 제대로 안 됐는데, 보고서를 어째 내노? 섣부르게 보고서 내마 일본놈들만 좋데이"


내가 말했다. 


"니미 씨발, 30년 동안 연구 안했음 연구 쫑 난거다. 내라! 씨발. 누가 니들더러 연구하라 했니? 니가 연구할 능력이나 되니? 어딜 팠더니 토층은 이렇고 이런 유적 유물이 나왔더라 이것도 보고 못한단 말이냐?"

 

1991년 계명대박물관이 조사한 김천 송죽리유적 고인돌


별지랄을 다했다. 한마디로 못낸다는 것이었다. 사실 저 꼴은 일본고고학 고질이었다. 일본 고고학이 저 모양 저 꼴이다. 근데 한국에서 지난 10년 이상 발굴조사 완료 이후 2년내 강제보고서 발간을 법제화하고, 이를 준수하지 않는 기관은 퇴출하고 그 책임자는 처벌하기 시작했다. 


이 변화가 일본, 그리고 중국으로 급속도로 퍼졌다. 중국?


이 친구들 요즘 발굴성과 각종 형태로 즉각 즉각 공간되기 시작했다. 과거와 같은 꽁치기 전통 없다. 거의 다 모조리 공개한다. 

 

1970년대 국립경주박물관이 조사한 경주 조양동고분군. 발굴보고서는 2000년대에 와서야 나왔다. 것도 김태식한테 열라 쪼임을 당하고서 말이다.


이 움직임, 한국이 주도했다는 거 아는가?

 

(2017. 3. 31) 

 

***

 

이렇게 냅다 얻어터지던 대학박물관들이 언젠가부터 우린 발굴비만 받았지 보고서 발간 비용을 받은 적이 없다는 궤변 같은 논리를 내세우기 시작했다. 안 받아? 뭘 안받아? 다 삥땅 친거다. 

 

이 논리와 별개로, 혹은 현실을 감안했음인지 문화재청에서도 2000년 이전 미발간조사 비용을 지원하기 시작해서 한창 그 작업이 벌어지고 있다.

 

이 사업, 언젠가는 철퇴맞는다. 2중지원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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