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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AYS & MISCELLANIES

빚에 대하여

by taeshik.kim 2023. 8.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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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2년을 놀았다. 그 놀음은 비자발이었으니 해고가 초래한 이 기간을 나는 축복으로 만들려 했으며 지나고 보면 그런대로 그 언저리에 가지 않았나 한다.

그 축복이 어찌 나 혼자 힘이었겠는가? 주변에서 음으로 양으로 많은 이가 도와줘서였다.

일전에 두어 번 한 말이기는 하지만 저 축복이라 부르는 기간 실은 내가 가장 많은 빚을 진 시즌이기도 하다. 느닷없이 백수가 되었다니 이런저런 자리를 제안하는 분이 있는가 하면 이런저런 자리, 돈 나오는 자리로 초대하기도 했다.

이런 분들 목록을 내가 따로 작성하지는 않았다. 꼭 블랙리스트 화이트리스트 같은 느낌도 나고 또 내가 그리 치밀하게 사는 사람은 아닌 까닭이다.


하늘은 정언명령한다. 고마움은 갚아야 한다고.



다만 그들은 내가 앞으로 어케든 갚아야 하는 빚쟁이들이다.  꼭 백수 기간이 아니라 해도, 실질적인 빚을 진 분들이 왜 없겠는가?

그런 분 중 일부는 이런저런 자리를 빌려 내가 초청하기도 했으니 꼭 청산이라는 논점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예컨대 기사나 글로써 보답하기도 했고, 지난날 아카데미를 운영하던 시절엔 강사로 모시기도 했다.

저와 같은 백수 시절엔 귀가 얇아지기 마련이라 무슨 제의가 오면 덥썩덮썩 물려하는 본능이 작동한다. 또 평소 실력 하나로 자부한 사람일수록 자괴감이 커질 수밖에 없으니 내가 매물로 나왔다는데 왜 영입제의가 없느냐에 실망할 수밖에 없다.

내 경우 저와 같은 고민이랄까 하는 문제들은 실은 너무 간단했으니 곧바로 해직무효소송에 들어가고 이내 일심에서 너무 싱거운 TKO승을 거둔 까닭에 결론은 시간이었지 결과는 아니었다.

이 해직 무효소송과 일심 판결은 밥벌이와 관련한 모든 고민을 일소하는 효과가 있었다.

그래서 더 바뻤다. 그 2년에 나는 책을 두 권 썼고 이런저런 자리를 지인들이 초대해준 덕분에 바쁘게 살았다.

어떤 이는 백수로 지내는 나를 긍휼히 여기어 연속강좌를 마련해주기도 했으며 기타 이런저런 자문위 같은 회의에 불러주었다.

백수가 사는 길은 오직 하나밖에 없다. 졸라 바빠야 한다. 가랭이 찢어지도록 바빠야 한다.

이때 더 고마운 사람들이 더 바쁘게 해 주는 사람들이며 더더더 고마운 사람들은 20만원짜리 두 시간 자문회의에 불러주는 사람들이다.

나는 이 사람들한테 진 빚을 갚아나가는 중이다.

혹 내가 나를 향한 침뱉기 아닐까 싶어 못내 두렵기는 하나 그래서 배은망덕한 놈은 사람으로 치지도 않는다.

고마움이라는 빚은 청산이 없다. 죽을 때까지도, 아니 죽고나서도 갚아야 하는 빚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yIaD_cb40Q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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