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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AYS & MISCELLANIES

방황? 그건 사치였다

by taeshik.kim 2023. 8.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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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백산백 전형의 산촌 출신인 나는 국민학교 동창이라 해 봐야 마흔 명이었으니, 졸업할 때는 이보다 두어 명 줄었을 것이다. 그 입학졸업 동기생 중 벌써 다섯인가가 이런저런 이유로 아주 갔다. 그것도 이미 사십대 시절에 이랬다. 

그런 친구들 중에 생업 전선에 뛰어든 시기가 내가 가장 늦었으니, 그때야 그래도 중학교는 졸업해야 한다 해서인지 다들 중학교 졸업, 혹은 고등학교 졸업과 더불어 다들 생업 전선에 뛰어들어, 구미로 대구로 울산으로 공장에 돈 벌러 갔다. 

이런 친구 중에는 이미 할매 할배가 된 이가 꽤 많은 이유가 매우 이른 시기에 생업 전선에 뛰어든 데서 말미암는다. 어느 시대 어느 사회를 막론하고 학력과 결혼연령은 반비례한다. 

훗날 그 친구들이 어땠는지 모르겠는데, 나는 저 깡촌에서 대학물을 먹은 몇 안 되는 놈 중 한 명이다. 그것도 유학이랍시며 서울 생활을 시작했으니, 친구들이 생업 전선에 뛰어들어 한참 제 밥벌이는 물론이요, 가족까지 힘겹 먹여살리던 그 시절에 나는 여전히 학생이었다. 

그런 그들에 견주어 내가 무에 유별나게 할 말이 있겠으며, 또 내가 입만 열면 가난을 한탄하며 세상을 원망한들 일찍이 생업 전선에 뛰어들어 육박전을 벌인 저들 앞에서 무에 내가 더 할 말이 있겠는가?

그런 내가 아버지 어머니한테서 완전히 금전에서 독립한 때가 대학 2학년 마치고 육군 병장으로 만기제대하고 3학년으로 복학한 90년 2월이다. 이때부터 나는 내가 벌어 다녀 오늘에 이른다.

이런 말에 나도 그렇다는 친구가 제법 많은데, 그렇지 아니하면 굶어죽을 수밖에 없는 사람과 그렇지 아니하는 사람이 같을 수는 없다.

더구나 나보다 더 훨씬 일찍 생업전선에 뛰어들어야 했던 그 친구들에 견준다면 더더구나 처절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이런 나를 알아달라? 그딴 싸구려 동정 살 생각도 없고 바라지도 않는다. 

내가 미끄러지면 온 집안이 풍비박산 난다는 절박, 이 딱 하나가 나를 버틴 힘이다. 그 절박은 오늘이라 해서 다를 수는 없다.
 

아버지



더구나 국민학교인가 중학교인가 다니다가 이 깡촌에선 희망이 없다며 돈 벌겠다고 야반도주를 감행하고선 경부고속도로 건설현장이며 하는 각종 막노동 현장을 전전하다 그런 삶을 이기지 못하고 어린 자식 둘을 남기고는 87년 자살해버린 형을 아버지와 함께 묻으면서 이 더러운 가난이라는 굴레는 내가 끊어버리며 나는 절대로 엄마 아버지보단 일찍 죽는 일은 없을 것이라 결심하고는 참말로 요란스레 살아왔다.

그렇다고 내가 방탄 방일이 없었겠는가? 한때는 놀 만큼 놀았다.

그래도 그런 나한테 방황은 사치였다. 왜? 내가 무너지면 온 가족이 무너지깐 말이다.

방탄해도 방황까지 이르지 않은 오직 단 한 가지는 이유는 그 절박성 때문이었다.

그래서 잘 됐는가? 그건 내가 말할 문제는 아니지만, 그런대로 내가 저 87년에 결심한 그 언저리에는 갔다고 본다.

연말정산이면 그 서류에 등장하는 부양가족 구성원을 볼 때마다 한숨이 푹푹 난다.

여기서 내가 미끄러지면 저 우수수한 저 양쪽 집안이 풍비박산한다.

그래서 나한테는 방황은 사치였다.

내가 이랬기에 이른바 라떼니 하는 꼰대기가 더 강할지 모르겠다.

그래 나는 네 아버지 뭐하시노? 이걸 반드시 묻는다. 그 아버지가 내 삶을 구속하기 때문이지 딴 이유 없다.

난 찢어지게 가난한 아버지를 뒀기에 방황은 사치였다. 그 아버지가 물려준 가난을 아버지는 할아버지한테 물려받았으며, 그 할아버지는 그 가난을 또 그 아버지, 나한테는 증조한테서 대물림했다.

이 아버지 할아버지들은 모조리 학생부군신위다.

이걸 내가 끝장내야 했다. 프로메테우스 저주를 내가 풀어내야 했다.

그래서 성공했을까?

모른다.

다만 예까지 오는 길이 참말로 고난했다는 말은 해둔다.

그런 나한테 방황은 특권이 아니라 사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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