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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군육진은 위도가 우리 생각보다 훨씬 높다.
사군 육진은 홋카이도 남부지역과 위도가 같다.
세종 때 이 지역에 사민이 이루어진 것은 여러모로 의문스러운 점이 많다.
우선 도대체 뭘 먹고 살았을까?
일본사에서도 15세기에는 저 위도까지 올라가지를 못하고 있었다.
특히 두만강 연안의 사민정책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루어지고 유지되었는지,
도대체 뭘 먹고 살았는지 밝혀진 것이 너무 없다.
거듭 이야기 했지만 북방 사민은 그냥 올라가서 지킨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일본사에서 북해도까지 올라가 개척을 한 시대는 메이지유신 이후에야 본격화하는데
이 당시 북해도에 심을 적당한 종자가 없어 개척농민들은 크게 고생을 했다.
일본 동북지역은 19세기 초중반까지도 만성적인 흉년에 시달렸는데
결국 그 이유는 벼농사가 안정적이지 않아 툭하면 냉해를 입었기 때문이다.
세종 당시 삼남지방에서 사민을 했다고 한다.
그러면 삼남 지방의 종자를 가지고 이동했을 텐데,
삼남지방의 종자로 농사를 지어 과연 두만강 유역에서 제대로 수확이 되었을까?
세종 당시 육진개척은 필설로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괴로운 사업이었을 것이다.
#북방진출 #사민 #북방사민 #북방개척 #북방한계선
*** Editor's Note ***
저 사민이 준 고통을 증언한 시가 있다.
용재총화로 유명한 성현이 직접 보고 쓴 시다.
용재慵齋 성현成俔(1439~1504)이 목도한 조선 초기의 북방 강제 사민徙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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