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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에서 입거인을 만나다〔路逢入居人〕
성현成俔(1439 ~1504), 《허백당집虛白堂集》 제14권 시詩
못 보았는가 영호남은 사람 넘쳐나 / 君不見湖嶺人稠車接轂
천만 채 집 즐비하게 들어선 모습을 / 比櫛魚鱗千萬屋
또 못 보았는가 오랑캐 접한 국경엔 / 又不見龍荒朔野狄爲隣
초목만 우거지고 사람 하나 없던 모습을 / 灌莽滿目空無人
동남쪽은 꽉 차고 서북쪽은 텅텅 비어 / 東南富實西北虛
사람 모아 변방 채우는 일 늦출 수 없었네 / 募民徙塞不可徐
소 몰고 말 타고 어린아이 둘러업고 / 驅牛乘馬聯襁褓
고을에선 밥 대며 길 떠나게 재촉했지 / 州縣傳餐催上道
간장 찢어질 듯 소리 죽여 흐느끼니 / 呑聲暗泣肝腸裂
이웃 사람 듣고서는 같이 오열했지 / 隣里聞之共嗚咽
천리길 고생하며 황벽한 들에 와서 / 間關千里到窮郊
띠풀이 이엉 베어 울 엮고 집 지어 / 編籬作室誅蓬茅
쉼없이 부지런히 갖은 힘 쥐어 짜 / 勤勞力役於其中
삼년간 밭 일구며 농사 전력했지 / 三春畚鍤明農功
지난날 갖은 고생 지금은 기쁨이고 / 昔之愁苦今懽康
자루 담던 식량 창고는 가득하네 / 昔之囊橐今囷倉
따순 옷 배 부른 양식 갖췄는데 / 所須煖衣與飽食
어찌 동서남북 떠돌 일 있겠는가 / 安用東西與南北
입거인入居人 : 조선 초기 국경 지역에 이주하여 살도록 한 백성을 가리킨다. 세종 때 새로 개척한 4군郡과 6진鎭에 하삼도下三道 백성들을 이주시켰던 데서부터 시작되었다.
이상은 한국고전번역원 번역에 의한다.
못 보았는가 영호남은 사람 넘쳐나 / 천만 채 집 즐비하게 들어선 모습을 // 또 못 보았는가 오랑캐 접한 국경엔 / 초목만 우거지고 사람 하나 없던 모습을 // 동남쪽은 꽉 차고 서북쪽은 텅텅 비어 / 사람 모아 변방 채우는 일 늦출 수 없었네 //
이 초반 네 구는 영호남과 북방의 인구 대비다. 남쪽엔 사람이 너무 많아 탈이고, 북쪽엔 너무 없어 문제라는 것이다. 그래서 조정에서 넘쳐나는 남방 백성을 텅빈 북쪽으로 사민할 수밖에 없었다는 논리를 제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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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이제 어찌 해야겠는가? 옮겨야지 않겠는가? 그 다음 아래 네 구가 강제 사민을 묘사한다.
동남쪽은 꽉 차고 서북쪽은 텅텅 비어 / 사람 모아 변방 채우는 일 늦출 수 없었네 // 소 몰고 말 타고 어린아이 둘러업고 / 고을에선 밥 대며 길 떠나게 재촉했지 // 간장 찢어질 듯 소리 죽여 흐느끼니 / 이웃 사람 듣고서는 같이 오열했지 //
사민은 강제할당이었다. 가장 먼저 지원자를 모았겠지만, 이럴 때 내가 가겠다 나서겠다는 사람 없다. 그래서 관아에서 강제 할당한다. 가장 먼저 선발 대상이 된 친구들이 선택의 여지가 없는 사람들이었다.
죄수!!! 이들은 언제나 이럴 때 총대를 매야 한다. 죄 지은 사람들로 복역자가 가장 먼저 강제로 할당되어 떠났다.
자 떠났으니 이젠 정착해야 한다. 성현은 그 정경을 아래와 같이 묘사한다.
천리길 고생하며 황벽한 들에 와서 / 띠풀이 이엉 베어 울 엮고 집 지어 // 쉼없이 부지런히 갖은 힘 쥐어 짜 / 삼년간 밭 일구며 농사 전력했지 //
이 대목에서 비로소 성현은 철저한 어용 시인 모습을 보인다. 떠남은 비자발이고 강제였지만 정착해서 스스로 바지런히 움직여서 농사도 잘 짓고 집도 잘 지었단다. 그렇게 3년을 투자하니 이런 모습으로 바뀌었단다.
지난날 갖은 고생 지금은 기쁨이고 / 자루 담던 식량 창고는 가득하네 // 따순 옷 배 부른 양식 갖췄는데 / 어찌 동서남북 떠돌 일 있겠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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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노래가 왜 살아남았는가? 바로 이런 어용성에서 비롯한다. 이게 다 백성 스스로가 부지런하고 국가가 왕실이 조정이 잘해서라고 찬탄한다.
하긴 사민이 순전히 고통뿐이었다고 노래했다면, 성현이 목숨을 부지했겠는가?
철저한 어용시다.
고전번역원 설명에 의하면 이 시는 성현이 성종 19년(1488) 사은사로 중국에 다녀오는 길에 평안도 지역으로 이주해서 정착한 백성들을 만났을 때 지었다고 한다. 조정 정책에 따라 눈물 흘리며 정든 고향을 떠난 남쪽 지역 백성들은 낯설고 황량한 변방 땅에서 집을 짓고 농토를 개척하느라 온갖 고생을 해야 했다. 이 시는 그런 고통을 노래한다.
고 하지만, 무책임한 풀이 혹은 이해다.
그럼에도 저 증언은 조선 전기 북방 개척에 따른 강제 사민을 직접 소재로 채취해 그들을 직접 보고 말을 나눈 사람이 남긴 증언이라는 점에서 대서특필해야 한다.
더구나 성현은 아마도 저 시를 짖기 전에는(내 기억에 의존하는 까닭에 후일 수도 있다) 평안도관찰사를 역임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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