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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이모저모

사비성, 누구나 다 안다지만 아무도 하지 않고 그래서 못한 이야기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23. 4.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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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걸 보면 부여는 백제 도읍기 시절에는 무덤을 쓸 공간이 나성을 중심으로 동남쪽밖에 없다. 북쪽이나 서쪽은 금강을 건너야 했으며, 그렇게 해서 무덤을 쓰는 왕경인이 없지는 않았겠지만 얼마나 불편했겠는가?

 
"(부여) 나성 안에서는 현재까지 백제 시대 무덤이 발견되지 않는 것으로 보아, 무덤은 반드시 나성 바깥에다가 만들도록 하는 백제시대 법률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어느 잡지 문화유산 내 글에다가 집어넣은 구절이거니와, 나는 이 주장을 대략 15년 전쯤 이래 줄곧 했다. 

물론 그 전에도 그런 주장이 있었는지 모르지만, 이후 나는 부여 나성 안에서 백제시대 무덤이 나올지 말지를 계속 주시하는 중이거니와 이후에도 없다고 안다.  

왜 이런 현상이 빚어졌는가?

이장移葬이다. 

적어도 부여가 왕성으로 확정 공포되면서 그 시행령에는 나성 안 무덤은 이장하라는 명령이 있었다. 

예서 관건은 나성 축조 이전에 있었다가 빠져나간 백제 무덤 흔적이다. 

일시에 빠져나간 무덤들은 예외가 있겠지만 거의가 동나성 바깥으로 탈출했다. 

나성 건설 초창기 무덤 중에는 이장묘가 많을 것이다. 

이 점을 사비고고학도들은 유념했으면 싶다. 

이럴 때마다 꼭 알짱대면서 "그건 다 아는 얘기"라고 하는 놈이 있지만, 사비고고학도 중엔 그런 자가 없으리라 본다. (2017. 4. 20)

 
***
 
475년 개로왕이 참수되는 비극에 웅진을 선택한 백제는 60년을 버티다가 같은 금강변 하류 그 인접 서남쪽 지금의 부여땅에 정착하니 이때가 536년이다.

사비 천도는 웅진 천도와는 사뭇 배경이 달라, 누구나 예상하듯이 사전에 많은 준비를 거쳐 확정됐다고 봐야 한다.

이 경우 관건은 신도시 건설에 맞춤한 택지 개발이다. 신도시는 말할 것도 없고 더구나 그 신도시가 도읍이래면 무지막지한 투자가 이뤄져야 하는데 이를 둘러싼 움직임이 사서史書에선 누락 산삭되고 말았다.

 

사비시대 벡제 왕가의 공동묘지인 부여 능산리 고분군에서 바라본 능산리 절터와 그 너머 부여나성. 이쪽이 나성 밖이요, 저 담장을 넘어서면 그곳이 바로 살아있는 왕이 지배하는 독점 구역인 왕경이요 도성이다.



백제 도성으로서의 부여, 곧 사비가 특이한 점은 바로 이 지점이다. 택지 개발이 사전에 준비되고 마침 또 그런 시대가 120년가량 지속하다가 느닷없이 나라가 망하는 바람에 사비성은 도성 역사 연구에서 희한한 호조건을 선사한다.

사비성은 왕경 구역을 표시하는 징표가 있었으니 부여나성으로 일컫는 성곽이 그것이라, 이 성곽 안에서 현재까지 발견되는 동시대 백제무덤은 단 한 기도 없다.

이런 일이 있을 수가 없다. 함에도 이런 현상이 빚어지는 까닭은 신도시 조성에 즈음한 그 구역 내 무덤은 이장하라는 강력한 율령이 시행되었기 때문이다.

그 시범은 왕실과 조정이 먼저 보여야 했으므로 왕릉은 나성 동남쪽 대로변 한 구역을 차지하고 여타 권력자들도 그 인근 기슭을 찾아 묘역을 나와바리 쳐서 삼았다.

더 흥미로운 점은 이런 상황이 백제가 멸망하고 신라에 편입된 뒤에도 그대로 답습됐다는 사실이다.

부여나성 안에는 백제무덤은 고사하고 통일신라무덤도 없다.

이를 어찌 해명해야 하는가?

나는 관습의 굴레로 본다. 다시 말해 백제도성 시대 이래 계속한 나성 안에는 무덤을 쓰지 못한다는 전시대 율령이 그대로 굳어져 그것이 모름지기 따라야 하는 관습으로 굳어졌기 때문이라고 본다.

이는 한양도성의 경우를 비교하면 이해가 쉽다.

한양도성 안에도 조선시대 무덤이 없다.

조선왕조가 망하고 식민지시대를 떠나 현재의 대한민국 시대에 이르기까지 도성 안엔 무덤을 쓰지 않았다.

이 점에서 도성 외곽을 쳐두른 담장 나성羅城이 지닌 진정한 의미를 우리는 추출한다.

나성은 피아彼我를 구별한 심리적 마지노선이다. 그 심리는 복합이라 정치 상징으로는 왕이 독점을 직접 지배는 관철하는 배타구역이다. 그 바깥이 바로 지방이라 이 지방은 봉건제적 분할이 이뤄져 제후들이 통치를 대리한다.

또 나성은 피안의 시작이다. 그 안은 살아있는 자들이 사는 구역이며 그 밖이 죽은 사람들의 세계라는 경계선이다.

따라서 나성은 성聖과 속俗이 분기하는 지점이다. 예서 성은 王을 절대지존으로 삼는다.

다만 조심할 점은 나성은 빗금이 아니라 line이라는 사실이다. 라인은 바늘 하나 꽂을 여지를 주지 않는 확실성이 장점이나 빗금이 주는 buffer zone 라는 충돌 흡수장치가 없다.

이것이 주는 위험성을 권력은 본능으로 알았다. 王이 곧바로 民과 대면하는 일은 그만큼 위험했다. 이 직접 대면은 근대 국민국가가 개막하면서 더 강화하긴 하지만 주권을 왕 혼자서 독점하는 시대는 그만큼 위험을 노출하는 일이었다.

이 버퍼 존이 바로 경기京畿다. 경기는 태생이 본래 총알받이요 방탄조끼다. 백제가 사비시대에 이 경기를 어찌 설정했는지는 현재로선은 알기는 어렵다. 물론 나는 짚이는 지점이 있으니 이는 다른 자리를 빌려 전론을 펼쳐보고자 한다.

덧붙이건데 당시 저와 같은 논의에 당시 경주와 부여가 어디에서 만나고 갈라지는지 토의가 잠깐 있어 내가 의견을 보탰으니 추리면 다음과 같다. 
 
경주는 천년왕국 줄곧 수도였고, 부여는 신도읍으로 조성됐다. 그런 까닭에 부여는 대규모 택지개발이 가능했다. 경주는 아예 불가능했으며, 나아가 경주 분지 무덤은 적석목곽분이라는 구조로 인해 이장이 거의 불가능하다.

하지만 이런 경주도 법흥왕 이후엔 강력한 무덤 조성 관련 규제가 나타난다. 더는 구도심에는 무덤을 쓰지 못한다는 명령 말이다. 경주 분지, 더 정확히는 왕경이라는 구역에 (법흥왕 이후에 등장하는) 석실분이 나타나지 않는 이유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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