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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이모저모

[클레오파트라는 흑인이었나?] (2) by 유성환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23. 4.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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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오파트라 상

 

클레오파트라 7세 필로파토르(Cleopatra VII Philopator: 재위 기원전 51-30년)가 – 부분적으로라도 – 아프리카계 흑인일 가능성이 있다는 주장은 그녀의 배다른 여동생 아르시오네 4세(Arsionë IV: 생몰 기원전 68/63-41년)의 어머니가 이집트인 혹은 흑인(누비아인)이었을 것이라는 주장에 따른 것입니다.

이런 주장을 한 사람은 오스트리아 고고학자 힐케 튀르(Hilke Thür: 1941년-현재)입니다.

아르시오네 4세는 클레오파트라 7세의 아버지이기도 한 프톨레마이오스 12세 네오스 디오니소스(Ptolemy XII Neos Dionysos: 재위 기원전 80-51년)와 신원이 밝혀지지 않은 왕비 사이에서 태어난 것(여섯 명 중 넷째, 딸 중에서는 막내)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기원전 58-55년 프톨레마이오스 12세 딸 중 한 명인 베레니케 4세 에피파네이아(Berenice IV Epiphaneia: 기원전 77-55년)와 (왕비 혹은 또 다른 딸로 추정되는) 클레오파트라 6세 트뤼파에나 2세(Cleopatra VI Trypahaena II: 미상-기원전 57년)가 왕위를 찬탈하자 프톨레마이오스 12세는 로마로 망명했으며 당시 제1차 3두정 체제 실력자 중 한 명이었던 폼페이우스(Pompey: 생몰 기원전 106-48년)의 신세를 졌습니다.

기원전 55년 프톨레마이오스 12세는 로마의 지원을 받아 가까스로 왕위를 되찾을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클레오파트라 7세 시대는 헬레니즘 시대가 저물고 로마가 지중해 전역을 아우르는 제국으로 발돋움했던 때였습니다.)

 

안토니우스를 만나는 클레오파트라



베레니케 4세는 이때 처형당했습니다. 그리스 지배기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이처럼 권력투쟁으로 인한 골육상잔이 스스럼 없이 자행되던 살벌한 시기였습니다.

기원전 51년 프톨레마이오스 12세가 죽자 그의 아들 프톨레마이오스 13세 테오스 필로파토르(Ptolemy XIII Theos Philopator: 재위 기원전 51-47년)와 클레오파트라 7세의 공동통치가 시작되었으나 프톨레마이오스 13세는 누나였던 클레오파트라 7세를 권력에서 축출해버렸고 그 결과 절대권력을 놓고 남매 간에 격렬한 내전이 발생했습니다.

이런 와중에 율리우스 카이사르(Gaius Julius Caesar: 생몰 기원전 100-48년)가 이집트로 피신한 폼페이우스를 쫓아 알렉산드리아로 왔습니다.

카이사르는 프톨레마이오스 12세의 유지를 존중하는 차원에서 프톨레마이오스 13세와 클레오파트라 7세의 공동통치 체제를 복원시켰으며 프톨레마이오스 12세 막내아들인 프톨레마이오스 14세(Ptolemy XIV: 재위 기원전 47-44년)와 아르시오네 4세에게는 기원전 58년 로마가 병합한 키프로스를 공동으로 다스리도록 조치했습니다.

그러나 이에 반발한 아르시오네 4세는 이집트에서 군사를 일으켜 로마에 대항했지만 한때 그녀를 따르던 이집트 군의 지휘관들이 카이사르에게 인질로 잡혀 있던 프톨레마이오스 13세를 석방하는 조건으로 그녀를 로마 군에 넘겨버림으로써 그녀의 저항은 실패로 끝났습니다.

이후 카이사르의 전리품으로서 로마로 압송된 아르시오네 4세는 에페소스의 아르테미스 신전에 유폐되었다가 클레오파트라 7세의 사주를 받은 그녀의 두 번째 애인 마르쿠스 안토니우스(Mark Anthony: 생몰 기원전 83-30년)의 명령에 따라 기원전 41년 살해되었습니다.

클레오파트라 7세의 남동생들이었던 프톨레마이오스 13세와 프톨레마이오스 14세 역시 공동통치 기간 중 모두 살해당했습니다. 짐작하시는 것처럼 범인은 클레오파트라 7세로 추정됩니다(CUI BONO?).

 

로마시대 클레오파트라 벽화



동생들을 제거한 클레오파트라 7세는 자신과 카이사르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카에사리온(Caesarion: 생몰 기원전 47-30년)을 프톨레마이오스 15세 카이사르(Ptolemy XV Caesar: 재위 기원전 44-30년)로 즉위시킨 후 자신의 공동 통치자로 삼았습니다.

1926년 에페소스(Ephesus)에 위치한 거대한 분묘 묘실에서 15-18세 여성으로 추정되는 유골이 발견되었습니다. [지금은 ‘옥타곤’(Octagon)이라고 불리는 분묘에 대한 발굴은 1904년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런데 1990년대에 앞서 언급한 오스트리아 고고학자 힐케 튀르는 이 ‘옥타곤’의 8각형 모습이 알렉산드리아에 건립된 파로스 등대(Lighthouse of Pharos)의 두 번째 기단부의 8각형 모습을 본 딴 것이며, 분묘에서 발견되는 다른 이집트식 건축양식을 고려했을 때 이 분묘는 에페소스의 아르테미스 신전에 유폐되었다가 살해된 아르시오네 4세의 것이라고 (제멋대로) 추정했습니다.

또한 분묘에서 발견된 유골 각 부위의 치수 – 특히 두개골 길이 – 를 고려한 결과 아르시오네 4세는 흑인 외형을 지닌 여성이었다고 주장했습니다.

클레오파트라 7세가 흑인일지도 모른다는 주장은 바로 힐케 튀르의 이런 가설에 근거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에 대한 반론 역시 만만치 않습니다. 고대 로마를 전공한 영국 고전학자 메리 비어드(Winifred Mary Beard: 1955년-현재)는 힐케 튀르의 주장을 다음과 같이 반박하는데, 저는 메리 비어드의 주장에 공감하는 쪽입니다.

이제부터 그녀의 반박을 하나씩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우선 '옥타곤'이라고 불리는 분묘 그 어디에도 이것이 아르시오네 4세의 것이라는 기록이 없습니다.

따라서 힐케 튀르가 분묘의 모티프를 근거로 내린 막연한 추정을 제외하면 이 분묘에서 출토된 유골이 아르시오네 4세의 것이라는 사실을 확정해줄 증거는 전무합니다.

아울러 분묘의 규모 또한 권력투쟁에서 패배하여 살해 당한 이국 왕녀의 것이라고 보기에는 너무 큽니다.

둘째, 힐케 튀르가 아프리카계라고 단정한 유골 중 일부는 현재 남아 있지 않습니다.

유골의 외형적 특징이나 특정 부분의 길이를 통해 인종을 정하는 방식은 유사과학(pseudoscience)으로 알려진 ‘골상학’(phrenology)에 속하는 것인데 골상학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 바로 두개골입니다.

그런데 분묘에서 발견된 유골 중 두개골은 제2차 세계대전(1939-1945년) 중에 소실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두개골 치수는 1926년에 측정된 것인데 그것의 신빙성을 인정하더라 하더라도 골상학 자체가 – 나치가 아리아인과 유대인을 구별하기 위해 자주 써먹었던 – 유사과학이라는 점은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합니다.

힐케 튀르는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1926년 발굴된 유골과 1985년 자신이 분묘의 묘실 벽감에서 수습한 나머지 유골에 대한 유전자 감식을 시도했지만 오염이 심해 그녀가 원하는 결과는 도출되지 않았습니다.

셋째, 유골을 통해 추정된 사망 당시 나이는 15-18세인데 아르시오네 4세가 살해되었을 당시 나이는 22-27세였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백번 양보해서 아르시오네 4세가 일부 흑인의 특징을 보였다 할지라도 클레오파트라 7세와는 어머니가 달랐기 때문에(클레오파트라 7세의 어머니는 클레오파트라 5세 트뤼파에나 1세이며 아르시오네 4세와는 달리 베레니케 4세는 클레오파트라 7세와 친자매 간입니다) 그녀와 클레오파트라 7세가 인종적으로 유사한 특징을 보일 가능성은 지극히 희박합니다.


관련 기사 (1):
https://web.archive.org/web/20090317185101/http://timesonline.typepad.com/dons_life/2009/03/the-skeleton-of.html

 

A Don's Life by Mary Beard - Times Online -  WBLG: The skeleton of Cleopatra's sister? Steady on.

There were enthusiastic reports this weekend that archaeologists had found the skeleton of the younger sister of Queen Cleopatra -- and that the bones suggested that Cleopatra herself was not ethnically Greek or Macedonian (as most people have assumed), bu

web.archive.org




관련 기사 (2):
https://rogueclassicism.com/2009/03/15/cleopatra-arsinoe-and-the-implications/

 

Cleopatra, Arsinoe, and the Implications

Just before bed last night I was deluged with bloggables, chief among which was a report in numerous newspapers about tests having been done on the bones of someone believed to be Arsinoe, Cleopatr…

rogueclassicism.com




이와 같은 반론을 바탕으로 저는 발견된 유골은 아르시오네 4세의 것이 아니며 설사 그것이 그녀의 유골이라 할지라도 제2차 세계대전 전에 측정된 두개골 치수를 근거로 한 인종구분은 전혀 신뢰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설사 그녀가 만의 하나 일부 흑인 특징을 지니더라도 이것이 클레오파트라 7세와는 아무런 연관이 없다는 점은 거의 확실합니다.

힐케 튀르는 이런 반박에 대해 학계에서는 늘 반론이 있었으며 일부 학자가 자신을 시기하는 것 같다는 다소 냉소적인 반응을 보인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아무튼 이번 클레오파트라 7세의 인종 논쟁을 보면서 “인종”(race)이라는 개념에 대해 다시 한번 성찰하게 되었습니다.

이와 관련된 이야기는 다음에 다시 한 번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넷플릭스 #클레오파트라 #클레오파트라_7세 #베레니케_4세 #아르시오네_4세 #퀸_클레오파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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