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엄한 사대부가 젊은 관료가 우연히 접한 음란통속소설에 매료되고 그러다 아예 그 작가 겸업을 선언하면서 당시 이 분야 절대지존 임봉거사를 밀어내고 촉촉 소설 베스트셀링 최고 작가로 우뚝 선다는 이야기라
한석규가 주연한 이 영화 음란서생은 이 블로그에도 유춘동 강원대 교수가 기고한 글이 있는 것으로 기억하는데 조선후기 방각본 소설이 생산 유통하는 과정을 그린다는 점에서 매우 독특한 위상을 자랑한다.
하긴 그 영화가 그리는 소설은 판각 인쇄를 전제로 하는 방각본보다는 그냥 필사 소설이라 부르는 쪽이 더 좋겠다 싶다.
저 영화를 보면 배우보단 성우로 명성이 자자한 원로배우가 필경사로 등장하는데, 그가 하는 일은 작가한테 넘어온 작품을 열라 붓으로 베끼는 그것이라 저 일로 생평을 살아간다.
저런 필경사가 실제로 있었다. 이 사람들 일은 오직 베끼는 일이었으니 요즘의 제록스 복사기 역할을 한 것이다.
이런 필경사는 무엇보다 속도가 생명이라 펜이나 볼펜도 없던 그 시절에 오로지 먹물로 써제꼈으니 중노동이었다. 저 분야 작업을 증언하는 자료가 남아있지 않아 아쉽기 짝이 없는데 하루 몇 십장 쓰지도 못한다.
손목은 다 나갔다고 봐야 한다.
그제 어느 케이블채널이 재방하는 저 영화보다가 우연히 필경사가 근무하는 책방이 배경으로 보여 살피니 서가에 꽂힌 책들이 어떤 데서 포개져 있고 어떤 데선 세운 모습이라
꼰대 정신 발현하면 전통시대에 책은 자빠뜨려 포개 놓지 세워 꽂는 법은 없다.
이는 무엇보다 제지술 때문이라 세우는 전통은 하드커버가 나오고 나서야 가능한 일이지 동아시아 전통시대 책은 종이도, 커버도 흐물흐물해서 세우기가 매우 곤란하다.
다만 두 전통 모두 책 제목은 어케 보관하건 눈에 잘 띄어야 한다 해서 그 표식엔 무척이나 신경썼으니 동아시아 전통에선 책 바닥면이 서가 밖으로 노출되도록 하고 거기다 제목을 써서 필요함에 대비한 것이다.
요새 언론사로 배달하는 보도자료용 신간을 보니 이 쪽에다간 모조리 증정 이란 도장을 박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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