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잡학이라, 한 곳에 진득이 안주하는 일이 없다. 다만 이런 잡학은 양계초가 그랬듯이 참말로 게슬스러워 정신없이 한쪽에 팔려 그걸 뜯어먹다가 금방 질려버리고서는 다른 데로 금방 옮겨가니, 흡사 메뚜기떼랑 진배없다.
천상 그래서 참말로 내가 섭렵하지 아니한 데가 없다시피 하고,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이 문턱에서만 어슬렁거리다가 이내 다른 문지방으로 옮기고 말았으니 그래서 이 짓을 해 먹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런 내가 한때는 사역원司譯院에 정신 팔린 적 있는데, 이 인연으로 내가 장가갈 적에 주례로 모신 분이 이쪽 분야에서 혁혁한 전과를 낸 정광 선생이시다. 서울대 나와서 덕성여대서 교편을 잡다가 이내 고려대 국어국문학과로 옮겨서는 오래 봉직하다 정년퇴직하셨는데 팔순이 넘은 지금도 정신없이 논문을 써대신다. 논문은 고만 썼으면 하는데, 암튼 이 분 학적 인생에서 휴직이 없으니, 내가 참말로 부러운 점은 오직 한 길을 걷는다는 사실이다.
기자 초년병 시절인 96년 무렵으로 기억하는데, 당시 나는 경찰담당기자로 종로경찰서를 출입했거니와, 그 주된 출입처로 몇개 경찰서와 더불어 고려대가 있었으니, 그 고려대에 출입한 인연으로 그 대학박물관에 사역원 책판이 다수 소장되어 있었거니와, 이를 만난 인연으로 한동안(이라 했지만 몇년 정도라 해둔다) 요즘으로 치자면 국립통역대학원 정도에 해당하는 사역원 그 운용 자체와 더불어 그에 펴낸 각종 외국어학습교재에 정신이 팔려 그를 파고 든 적이 있다.
당시 이 분야에서 정광 선생이 독보적이었으니, 내 평생 선생이 없다 했지만, 지금도 이 분야에서는 오직 선생을 스승으로 삼는다. 사역원에서 펴낸 외국어 학습교재를 찍어내던 목판을 사역원 책판이라 하거니와, 이게 어찌된 셈인지 기적으로 더러 살아남고, 더 기적으로 고려대가 수장하게 된 모양이라, 그 가치는 다른 목판들에 견주어 내가 보건대 국보급이다.
그 책판들을 선생이 정리했던 것인데, 암튼 이런 인연으로 사역원 책판과 선생을 알게 되어, 공부해 보니 제법 재미가 있어, 닥치는 대로 관련 글을 읽는 한편, 전통시대 외국어 교육제도와 관련한 자료도 모으기 시작했더랬다.
암튼 이런 인연을 발판으로 99년 무렵인가 2000년 무렵 조선초 혹은 고려말에 발간된 중국어 학습교재 노걸대 발굴을 내가 단독 보도하는 개가도 있었으니, 이야말로 언론이라는 관점에서는 세계적 특종이라 나는 지금도 자부한다. 그에 비견할 사건은 경주손씨 고문서에서 발견된 원나라 시대 법전집 지정조격이 있으니, 그 발견에 얽힌 이야기는 훗날 따로 정리할 기회가 있을지 모르겠다.
암튼 이를 발판으로 노걸대며 박통사를 필두로 하는 무수한 외국어 학습교재들을 익숙하게 되었거니와, 20년이 훨씬 더 지나 지금 다시 그때 기억이 새록한 이유는 이제 다시 그것을 공부해야 할 이유가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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