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기간 문화재 기자 생활한 나를 두고 주변에서 더러 하는 말 중 하나가 "너 문화재 많겠다"거나 "너 문화재 많이 챙겼겠다"라는 게 있다. 하긴 내가 이 업계에 몸담은지 17년이니 그런 말이 나오는 것도 무리는 아니라 생각한다.
이는 기자 업계를 향한 고질적 시선도 한 몫했다고 생각한다.
어떤 분야라고 특정하진 않겠지만 문화 여러 분야 중에 물건 혹은 작품을 받기도 하는 곳도 있다는 말을 듣기는 했다. 하지만 그에 대해 나는 직접 겪은 일은 아니므로 생략한다.
아래 첨부하는 토기 쪼가리 두 점이 내가 문화재 기자 생활하며 챙긴 거의 유일한 진짜 문화재다. 대략 십년전쯤 경주 월성을 거닐다가 국립경주박물관과 인접한 남천 쪽 가까운 지점 성 내부에서 내가 수습해 가져왔다.
이거 말고 또 하나 챙긴 게 있다. 같은 무렵 중국 절강성 덕청으로 답사갈 일이 있었다. 토돈묘라고 해서 한국 고고학계 일각에서는 소위 한남도 남서부 기원전후에 등장하기 시작하는 소위 분구묘(墳丘墓) 시원으로 거론하기도 하는 독특한 무덤들도 보고, 덕청박물관도 들러 그곳을 잔뜩 채운 원시청자를 봤으며, 그 와중에 뽕밭 천지인 춘추시대 오나라 원시청자 가마터를 간 적이 있다.
그때 현장으로 우리를 안내한 현지 고고학도가 원시청자 사발 하나로 두 동강이 난 조각을 찾아주며 날더러 가지라 해서 갖고 온 적이 있다.
한데 실물은 어디갔는지 찾을 수가 없다. 언젠가 내가 페북에서도 소개한 적이 있다. 조간 난 점 빼곤 완형이므로 그걸 붙이면 그런대로 볼만은 하겠다며, 보존과학도한테 복원을 부탁하려 했다가 그럴 기회를 마련하지 못해 내가 나중에 본드로라도 붙여봐야겠다 했다가 행방이 묘연해졌다.
문화재 기자를 향한 저런 시각, 다시 말해 너 많이 챙겼겠다는 인식이 보편적이라 안다.
하지만 고고학도로 물건 꼬불치는 이 거의 없듯이 문화재 기자 역시 물건 꼬불치는 이 없다고 나는 안다.
그렇다고 내가 뭐 대단한 도덕감이 있다고는 자부하지 못하겠지만 외부에서 바라보는 것보다는 훨씬 도덕적인 삶을 산 편이다. 문화재 업계가 도덕적인 삶을 강요했다고 하는 편이 정확할지 모르겠다.
한데 저런 시각이 다름 아닌 언론사 내부에서도 엄존한다. 저런 말 가장 자주한 이가 실은 동료 기자사회 일원들이었다.
이들은 내가 문화재 기자 생활하며 골동품이라도 엄청 챙긴 줄 안다.
하지만 내가 일전에 말했듯이 기자업계에서 적어도 문화재 분야는 이런 일반 통념과는 달리 엄청 깨끗한 편이다.
돈? 물건?
주는 데도 없고 받는 기자도 없다.
한마디로 개털인 출입처다.
그럼에도 내가 엄청 챙기고 다닌 줄로 안다.
엄청 챙기니 오래도록 붙잡고 놓지 않으려 한다고 했다.
문화재 분야..열라 어렵다.
그래서 나는 늘 배우고 살았다. 모르는 건 매양 물었고, 그것이 여의치 않으면 매양 관련 책과 논문을 보며 씨름하며 살았다.
돌이켜보면 지난 17년간의 문화재 기자 생활은 배움의 연속이므로 행복이기는 했지만, 고통이기도 했다.
늘 새로운 것을 쑤셔박아야 했으므로, 그것이 주는 압박감은 성취감과 더불어 항상 등가等價였다.
한데도 엄청 챙긴 줄로 안다. 내 전직 회사에서도 늘 이꼴이 벌어져 나를 향해 언제나 저 새끼는 문화재 많이 챙긴 놈이라는 인식이 한켠에서는 존재했다.
내가 문화부로 전근하기 전..그러니깐 대략 이십년전, 혹은 이십수년 전 나는 부산지사, 체육부, 그리고 사회부를 차례로 거쳤다.
한데 소위 풍족함으로 말하면 신기하게도 저 순서대로였다.
딱 1년간 지속한 부산지사가 가장 풍족했고, 2년반만에 도망간 체육부가 다음으로 풍족했으며, 2년만에 다시 탈출한 사회부는 개털이었다.
막 대통령이 된 YS가 어느날 느닷없이 "오늘부턴 단돈 십원도 받지 않겠다"고 선언한 직후에 시작한 부산지사 시절엔 설날이나 추석 연휴를 앞두고 며칠은 출입처를 나가지 않는 관례가 기사 사회에 있었다.
그땐 돈다발을 싸들고 기자실을 찾아오는 이가 많다고는 할 수는 없었지만, 더러 있었다. 사정 정국이 시퍼럴 때인데도 말이다.
들으니 YS 취임 전에는 그런 사람이 더욱 많았다고 한다.
체육부 시절엔 난 같은 부서 선배한테서 가끔 용돈을 얻어쓰기도 했다. 고생한다며 가끔 나한테 용돈을 주더라.
그 용돈 출처를 나는 알 수는 없지만 나는 그 선배 개인돈은 아니라고 지금도 생각한다.
그땐 그러했다.
좀 더 자세한 이야기를 듣고자 하겠지만, 이런 얘기들은 묻어둘 것이 더 많다.
(2016. 8. 18)
***
이 글을 쓸 당시 나는 해직 중이었다.
'문화재와 함께한 나날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적폐 혹은 구악의 귀환, 돌아온 해직기자 (0) | 2020.08.25 |
---|---|
한국문화를 비하했다는 기자 (1) | 2020.08.22 |
사역원에 미쳐날 뛴 시절 (0) | 2020.07.28 |
2015 세계유산위에서 자판기 드들기는 택배 아저씨 (0) | 2020.07.16 |
해직이 낳은 두번째 책 《능산리》 (7) | 2020.07.12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