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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략 4~6세기 동시대 왕릉 혹은 왕릉급 무덤을 비교하면 백제와 신라는 저렇게 대별할 수 있겠다는 말을 여러 번 했으니, 다시금 간단히 정리하면
백제가 구릉에 가까운 산을 파고 들어가 묻으면서 봉분은 있는둥마는둥 하고 마는 반면
신라는 평지에다가 거대한 봉분을 인공으로 쌓아 만든다.
그래서 그 무덤 자체를 비교하면 크기가 비교가 되지 않으리만치 신라 쪽이 압도적으로 크고, 그만큼 껴묻거리도 많을 수밖에 없다.
왜? 산을 파고 들어가서 신라만한 규모로 무덤을 만드려면 얼마나 많은 공력이 더 필요하겠는가?
한데 우리가 잊은 점이 있다.
백제의 무덤을 논할 때 그 배경이 되는 산을 곧잘 망각한다는 사실이 그것이다.
저 산이 있음으로써 저 산을 포함하는 전체 구역이 묘역墓域이 되는 것이며, 그런 묘역이 바로 다름 아닌 산릉山陵인 것이다.
반면 신라는 평지에다가 인공으로 산릉을 조성해야 했다. 그런 까닭에 저만큼 규모가 커졌을 뿐이다.
한데 같은 백제라 해도 왕가 묘지를 기준으로 하면 한성시대에는 현재까지 알려진 것으로 보면 석촌동고분군이 대표적이라 이건 완연한 평지다.
이는 아무래도 그네가 자리잡은 데가 한강변 평야지대라는 사실을 고려해야 한다.
한데 이 평야지대 시대에 백제 역시 규모가 열라리 컸다는 사실은 무엇을 말해주는가?
평지에다가 인공으로 산릉을 조성해야 한 까닭이지 뭐가 있겠는가?
이 산릉이라는 키워드는 하시라도 잊으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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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식이 내용을 구속한다, 부장품의 경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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