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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이모저모

도굴을 부른 후장厚葬(1) 박장薄葬과는 상대적이다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24. 1.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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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문화사를 보면 박장薄葬과 후장厚葬을 둘러싼 오랜 논쟁이 있었다. 

같은 유가 윤리로 무장한 사회라 해도 이를 둘러싼 생각은 시간과 공간을 달리하면 달라지기도 했으니, 조선시대는 대표적인 박장 지향 사회였다. 내가 볼 땐 뭐 묻을 것도 없어서 그랬겠다 싶기는 하지만 말이다. 

하지만 이것이 시대와 공간을 달리하면 또 달랐으니, 묵자시대에 그가 이끄는 교단이 강력한 힘을 발휘하던 중국 전국시대를 보면, 묵자 교단은 박장을 내세우면서 후장을 선호하는 유가를 맹렬히 공격하고 있음을 본다. 

 

조조 무덤. 저런 무덤에 무슨 박장이라는 말이 성립하겠는가?

 

그렇다면 박장이란 무엇이고 후장이란 무엇인가? 

죽은 사람을 땅에다 묻을 적에 각종 껴묻거리를 덕지덕지 넣어 쑤셔박는 시스템을 두터울 후厚에다가 장사지낼 장葬자를 써서 후장이라 하며, 그에 견주어 최소한의 그릇 몇 개 정도만 넣어주는 시스템을 엷을 박薄자를 써서 박장이라 한다. 

한데 이 후장과 박장은 아주 상대적이라, 박장이라 했는데 막상 파 보면 실제는 후장인 모습을 여러 군데서 보는데, 근자 중국에서 발견된 삼국시대 조나라 실질 건국자인 조조 무덤을 보면 완연해서, 

그는 죽으면서 유언하기를 박장하고, 봉분도 없애라 했지만, 실제 파 보니 극심한 도굴 피해로 유물이 몇 점 남아있지는 아니해도 그 껴묻거리 양상이 대단했음은 삼척동자도 아니, 그럼에도 왜 박장이라 했을까?

간단하다. 그 정도면 저 시대에는 박장이라 생각한 까닭이다. 다시 말해 본래는 10점을 껴묻거리로 쓰던 후장 사회에서 5점만 넣어도 박장이 된다. 

따라서 후장 박장은 동시대라 해도 서로에 대해 상대적인 개념이다. 

 

대가야 역시 대표적인 후장 지향 사회다. 지산동 고분군 73호분이던가? 거기다.

 

조선시대는 시종 박장을 지향했지만, 또 실제 고관대작 무덤으로 발굴된 데가 꽤 있으니, 시대를 통괄하고 조선시대는 내내 박장 지향이었음은 맞다. 시체를 싸매는 데 쓴 옷감 종류를 제외하고는 뭐 유물이라 해서 영의정이라 해도 건지는 건 몇 점 되지 않는다. 

박장과 후장을 논할 적에 저와 같은 점을 염두에 두면서 또 하나 우리가 시종해서 생각해야 할 대목이 바로 도굴이다. 

이 점은 다음 호에서 다룬다.  

 

남경 손오대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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