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J의 특별하지 않은 박물관 이야기

서울 사람은 누구일까

by 느린 산책자 2024. 2. 25.
반응형

박물관에서 일하면서야 알게 되었다. ‘서울 토박이회’라는 것이 있다고. 처음에는 별 생각 없이 ‘아. 서울에 오랫동안 살았던 사람들의 모임인가보다' 했는데, 생각보다 까다로운 기준이 있었다. ‘서울 사대문 안, 그리고 사대문 밖 10리 이내’에서 3대 이상 거주했던 사람만이 그 기준에 부합되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이 사실을 알게 되었을 무렵, ‘서울사람, 김주호’라는 작은 전시를 박물관 로비에서 하게 되었다. 평범한 서울사람인 김주호씨에 대한 일상사로 서울의 이야기를 본다는 취지의 전시였다. 

전시는 김주호씨의 개인적인 이야기를 담고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서울의 이야기와 사람들의 생활사를 담고 있었다. 나도 상당히 흥미롭게 보았고, 전시를 보러 오신 분들의 반응도 좋았다. 그런데 역시나 고질병이 또 도졌다. 하나의 궁금증이 피어올랐던 것이다. 

“서울사람이라 했을 때, 어디에 얼마나 살았던 사람이 ‘진짜 서울사람’인건가?”

서울사람의 기준
서울사람을 보는 기준은 사람마다 다를 것 같지만, 우선 충족되어야 하는 기준은 ‘서울에 살았던 경험’이 있는가다. 그래야 ‘서울’이라는 수식어의 기준이 어느 정도 충족될 것 같다. 

두 번째는 ‘얼마나 살았는가?’일 것인데, 이 부분은 다소 애매할 것 같다. 취직을 위해 올라온 사람도 서울사람일까? 

다시 돌아와 토박이회의 기준을 살펴보자면, 첫 번째 기준은 ‘조선시대의 성저십리’이다. 토박이회가 만들어진 것이 90년대 초라 하니,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사람들의 심리기저에 있는 ‘진짜 서울’이란 ‘사대문 안과 그 인근’까지였던 것이다. 실제로 어르신들의 인터뷰를 하다보면 ‘문 안’이라는 표현으로 서울을 칭하셨던 걸 보면, 이때로는 상당히 보편적인 생각이었던 것 같다.(박완서의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에서도 사대문 안과 바깥을 가르는 ‘문안’과 ‘문밖’이라는 표현이 많이 나온다)


일제강점기 숭례문 엽서. 이렇게 문을 잇는 성벽이 끊어졌어도 사람들의 마음 속에는 심리적 경계선으로 성벽은 작용했다. 이 경계선이 사람들에게 사라지게 된 시점은 역시 '강남'이 만들어진 때인 것일까?



두 번째로 ‘3대’라는 기준은 ‘오랫동안’ 살았던 사람들을 구별하기 위한 것일 것이다. 이 기준은 어디서 나온 것인지 모르겠지만, 보통 오래된 맛집을 이야기할 때도 ‘3대로 전해져 내려오는’이라는 표현을 쓰는 것을 보면 ‘3대’는 오래된 전통을 가진 무언가를 수식하기 위한 기준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어쨌든 이 기준은 당시 생각한 서울 토박이 기준이고, 서울에 상경하는 사람들과 구분하기 위한 기준이기도 하다. 다시 돌아와, 결국 서울사람을 말할 때는, 사람들이 심리적으로 생각하는 ‘서울’이란 어딘가라는 것이 연결될 수밖에 없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서울사람이란 
서울은 이제 ‘서울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여기에는 한국인도 있지만 외국인 등도 포함될 것이다’의 비율이 비등해고 있다. 점점 서울이 고향이 아닌, 타지 사람들이 사는 비중이 더 커지지 않을까 싶다. 

서울이라는 도시의 외관을 만드는 것은 ‘관’에 의한 것이겠지만, 도시에 살거나 혹은 주로 이용하는 사람들에 의해 생기는 작용으로 그 지역의 특징이 생겨난다. 이런 것을 보면 도시는 그 자체로 고정된 것이 아니라, 일종의 생명체이다. 

이런 측면에서 본다면, 서울의 특징은 ‘서울 고유’의 무언가가 아니라, ‘무언가 계속 섞이고 변형되는 성질’ 혹은 ‘다양성’이라 할 만하지 않을까하고 나는 옛날부터 생각해왔다. 

“그것이 무엇이냐?”  라고 묻는다면, 딱히 무엇이라 말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이렇게 섞이는 와중에서 생기는 역동성이 서울의 무언가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대한민국’의 역사와 대별되는 ‘서울’의 역사를 생각하려면, 서울사람이 누구인가를 생각해야 하는 것이 맞지 않을까. 

여전히 서울에 대해 잘 모르는 나는 이렇게 생각해보았고, 앞으로도 고민해볼 예정이다.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