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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이모저모

[선화공주의 비밀을 파헤친다] (1) 신라 공주를 취한 마를 캐는 백제 아이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24. 1.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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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선화공주 건은 여러 번 산발로 다룬 적이 있지만 이참에 제대로 정리해 보고 싶어 다시 붓을 댄다.

이 문제는 지금 우리 앞에 있는 화랑세기가 김대문의 그것을 필사한 소위 진본인가? 아니면 그 필사자인 남당 박창화라는 사람이 꾸며낸 역사소설인가를 판별하는 데도 가늠자가 된다.

백제 무왕武王은 삼국사기 그의 본기에 의하면 본명이 장璋이니, 법왕法王의 아들이다. 서기 600년, 부왕이 죽자 왕위에 올라 재위 42년째인 641 봄 3월에 훙薨했다.


용화산 쪽에서 내려다본 미룩사지 일대



그의 본기에서는 시호를 무武라고 하고는 사신을 당에 보내어 표문을 올리기를 “임금의 외신外臣인 부여장扶餘璋이 졸卒했습니다”고 아뢰니, 황제가 현무문玄武門에서 애도식을 거행하고 조서를 보내어 다음과 같이 위로했다고 한다.

“먼 나라를 위로하는 방도는 총애로운 책명보다 앞선 것이 없고, 죽은 자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의리는 먼 곳이라 해도 막힘이 없다. 고故 주국 대방군왕 백제왕 부여장 柱國帶方郡王百濟王扶餘璋은 산을 넘고 바다 건너 멀리까지 와서 정삭正朔을 받고, 조공과 글 올리기를 한결같이 하다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게 되었으니 추도하는 슬픔이 깊다. 마땅히 보통 예법 이상으로 애도를 표하여 광록대부光祿大夫로 추증하노라.” 그러고는 부의賻儀를 매우 후하게 내렸다.

삼국사기에는 그의 왕비에 대한 족적이 어디에도 없다. 한데 삼국유사로 넘어가면 사정이 달라져 저 유명한 신라 선화공주가 등장한다.

이곳 권제2 기이紀異 제2 ‘무왕武王’이라는 제하 기사는 마동과 선화공주에 얽힌 이야기가 얼개를 이룬다. 너무나 유명한 이 이야기에서 주제와 관련한 대목을 적출해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무왕은 “그 어머니가 과부로 수도 남쪽 연못가에 집을 짓고 살다가 그 연못의 용과 정을 통하고 아들을 낳았으니 어릴 적 이름은 서동薯童”이라, 늘 마를 캐서 팔아 생활했기에 이런 이름을 얻었다고 한다. 서동이란 ‘마를 캐는 아이’라는 뜻이다.

이런 서동이 신라 진평왕眞平王의 셋째 공주 선화善花(善化라 쓰기도 한다)가 아름답다는 말을 듣고 머리를 깎고 신라 서울로 들어가 갖은 술수를 써서 마침내 선화를 꼬드겨 아내로 취해 백제로 귀환하게 된다.

서동은 선화의 힘을 빌려 나중에는 막대한 재물을 바탕으로 인심을 얻어 왕위까지 차지했으니, 재위기간 중에는 용화산 아래 미륵사彌勒寺를 창건하게 된다.


미륵사 서삼층 석탑



이에 기반해 백제 무왕은 왕비가 신라 진평왕 딸인 선화라고 보았던 것이다.

심지어 이런 무왕이 재위 기간 내내 신라에 대한 적대적인 공세를 취한 원인으로 진평왕의 사위로서 누려야 하는 당연한 권리 찾기 일환으로 설명하기도 했으니,

이에서 비롯되어 이 시대를 주무대로 삼는 역사드라마에서는 항용 무왕이 “내가 사위로서 신라를 차지해야 한다”는 얼개를 엮기도 한다.

이런 주장은 실은 단재 신채호에게 뿌리를 둔다.

한데 이와 같은 무왕 시대의 역사상, 다시 말해 무왕의 왕비는 신라 진평왕의 딸인 선화공주라는 철석 같은 공식이 다름 아닌 무왕과 선화공주가 발원해 창건했다는 그 미륵사에서 무참히 깨지는 일이 생긴다. (2016. 12.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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