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심한 번역이 아니며, 눈에 보이는 대로 옮긴 것이니 상세한 인용은 직접 고고학잡지 1916년 6-3호를 보라.
나는 지난 메이지 42년(1909) 한국 탁지부 촉탁을 받아 다이이谷井 문학사 구리아마栗山 공학사와 더불어 백제 고도인 공주와 부여의 유적을 조사한 일이 있지만 본년 7월 곡정 문학사 및 후지타後藤 공학사와 조선총독부 촉탁을 받아 다시 부여에 이르러 그 부분을 답사하고 6일 두 사람과 갈라져 공주에 이르러 그 산성 연구를 시도했다.
앞선 조사에서는 성벽 유적의 외곽 형태 외에 백제시대 유물을 발견할 수 없었지만 이번에는 처음으로 분묘 발굴을 시도한 결과 당시 분묘 양식도 분명히 알게 되고 또 부장품이나 성벽 유적 출토 고기와의 문양이 크게 우리 나라시대의 그것과 친밀한 관계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우리는 지난 메이지 42년 겨우 이틀간을 허락받은 데다 눈까지 내리기 시작해 고분을 찾을 수도 없었다. 그 후 부여-논산간 신작로 개착에 즈음에 처음으로 능산리 산상에 고분 석곽이 다수 노출되어 있음을 발견했다. 게다가 올해에 이르러 마찬가지로 능산리에 왕릉이라 칭하는 고분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한데 지금까지 이 왕릉이 알려지지 않은 이유로 이 부근에 최씨라는 양반이 있었고, 지방 세력가로서 이 왕릉 부근에 그의 가묘를 만들었으므로 만약 왕릉일지도 모른다는 것이 알려지면 종국에는 그 가묘를 다른 곳으로 옮기지 않을 수도 없어 그 세력을 이용해 그곳 주민들에게 왕릉에 관한 일을 오래도록 비밀로 부치도록 엄명했다고 해서 오래도록 누구도 알지 못하고 지났지만, 우연한 일로 문득 군청에서 하는 말을 들어 세간에 알려지게 되었다.
이 왕릉에는 고분 6기가 산기슭에 무리 하나를 이루고 있지만 마침 내가 갔을 때는 구로이타黑板 문학박사(구로이마 가쓰미黑板勝美를 말함-인용자주)가 며칠 전부터 이미 이곳에 와서 그 중 가장 큰 것을 발굴하고, 다시 가장 작은 것을 발굴하고 있었다.
우리도 따로 고분 한 곳을 발굴조사하고 또 능산리에서 다수 고분까지 발견하고 그 중 세 곳을 발굴하고 처음으로 백제시대 분묘 형식을 알게 될 수 있었다.
왕릉이라 칭하는 부여의 동방 약 1리, 논산가도 북방 산록에 있어 상하 2열, 각열 각 3처, 도합 6처 고분이 일군을 이루고 있다..(중략)..
흑판 박사는 먼저 이 중에서 가장 큰 아랫열의 중앙총(중하총)을 발굴했다. 훌륭한 석곽이 있었지만, 이미 옛날에 도굴을 만나 어떤 부장품도 없었으므로, 다시 시험삼아 그 서쪽 인근 아래 무덤(서하총)을 발굴했다.
우리는 흑판 박사가 최초 발굴한 무덤의 위쪽, 즉 중상총을 발굴했으므로 (하략)
(2017. 1. 7)
***
1915년 능산리 고분 발굴은 세키노와 구로이타 양측 자료를 다 비교하면
얼개는 확실히 잡힌다.
어차피 다 도굴된 거 판 데 지나지 않아서 큰 의미는 없다.
뭘 팠는지가 아니라 왜 팠는지가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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