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직하면서 밤 새는 분 심정을 느끼다>
당직근무를 서는 중이다.
밤 깊어 고요한데 문득 이규보 선생이 숙직 선 이야기가 <동국이상국집>에 있을까 싶어, 찾아보니 몇 편 있었다.
그중 가장 연대가 이름직한 것을 골라 소개해본다.
엄밀히 말하면 숙직이라기보다는 잠 안자고 있던 데 가깝겠지만.
신령스러운 송악이 몹시 추운 줄 누가 걱정해 주랴 / 神岳苦寒誰更惜
ㆍ동지冬至 제사라 능에 묵을 때 송악松岳이 몹시 추웠다.
광릉에서 해 보내며 스스로 비웃는다 / 匡陵守歲自猶咍
푸른 관복입은 대축이라고 웃지를 말게나 / 靑衫大祝人休笑
매양 시 짓기 내기하면 내 시가 으뜸으로 돈단다 / 每賭新試一首廻
ㆍ낮은 벼슬에 있으면서 늘 축사(祝史, 제사 때 축문 읽는 관리)가 되었다.
ㅡ <동국이상국집> 전집 권10, 고율시, "섣달 그믐밤 광릉匡陵에서 머무르면서 짓다"
'광릉'은 어떤 왕이나 왕비의 능일텐데 누구의 것인지는 모르겠다.
아마도 송악산 자락에 바짝 붙어 위치했던가 본데 어느 섣달 그믐께, 이규보가 그 능에 제사지내기 위해 다다랐다.
소나무가 신병神兵으로 변해 거란족을 막아줬다는 그 송악산이 오늘 따라 왜이리 추운지!
재실齋室 창문 틈으로 들어오는 바람이 유독 찼던가, 하급 관료가 입은 푸른 관복쯤은 가뿐히 뚫었다.
섣달 그믐날 밤은 수세守歲라고 해서 잠을 자지 않고 지내는 풍속이 있었다. 이날 잠을 자면 눈썹이 허옇게 변한다나. 우리 백운거사도 그 풍속을 따라 밤을 지새운다.
추위, 졸음과 싸우며 이규보 선생은 자조自嘲한다. 이게 무슨 꼴인가...이래서야 글 쓸 생각도 잘 안 났을 것 같은데.
하지만 그러면서도 그에게는 하나의 자존심이 남아있었다. 바로 그 스스로의 시詩였다.
"이 추운 겨울날 능제陵祭 지내러 왔다고 내가 만만해 보이지? 하! 내가 누군줄 아나? 나 시 썼다하면 1등 먹는 이규보야, 왜 이래? ... ㄷㄷㄷ 에췌!"
*** 편집자주 ***
동지제사인데 섣달그믐? 언뜻 의아함이 있다.
축문은 과거에 합격한 신참이 주로 맡은 듯한 느낌을 준다. 왜? 뽀대 나는 일이 아니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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