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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이모저모

장례식 조문객과 사찰 낙성 축하객 (1) 빈소와 조문객

by taeshik.kim 2024. 1.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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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관대작을 지내거나 다른 분야에서 뚜렷한 족적을 남긴 사람의 죽음에 이르러 항용 보이는 표현 중 하나가 임금이 부의를 후하게 해서 장례를 치르게 했다는 말이거니와, 이런 점들이 왜 고고학도들한테는 심각하게 보이지 않는지 나로서는 신통방통할 뿐이다. 

조선시대는 기본이 이른바 박장薄藏이라, 일부러 값나가는 물건을 무덤에 넣는 일을 피한 전통이 오래되는 바람에 이걸 잊어버렸는지 모르지만, 나아가 시대별 문화권별로 넒나듦이 있지만, 근간은 후장厚藏이라, 값나가는 물건을 될수록 많이 넣음으로써 부와 권력을 과시하곤 했으니 

해당 무덤에 들어가는 껴묻거리 상당수가 이른바 부의賻儀였다는 사실을 하시라도 잊으면 안 된다. 

이 부의를 가능케 하는 절대 근거가 빈殯이라, 빈은 간단히 말하자면 조문을 받는 기간이다. 
 


동아시아문화권에서 권력자별로 그 크기에 따라 빈 기간을 달리한 까닭은 조문객 때문이다.

왕이나 황제라면 조문객이 국제적이라, 외국 조문사절이 와야 한다. 그네가 단순히 권력이 커서 긴 조문기간을 설정하는 것이 아니라 외방 제후를 비롯한 국내 조문객은 물론이고, 외국 조문객까지 받아야 하는 까닭이다. 

이는 종주국이라 해서 반드시 그런 것만도 아니라 이 조문은 주고받기라, 조공책봉 관계에서 이런 관계는 현저해서 예컨대 중국의 황제가 죽으면 황제가 죽었다는 공포가 있으니, 이를 발상發喪이라 한다. 발상한다는 표현이 사서에 자주 보이는데 실제 죽은 시점과 발상하는 시점은 보통 달라서 후자가 보통은 며칠 지나서 발상이 이뤄진다. 

죽음이 발생하는 지점과 발상하는 지점이 길어질수록 음모가 그만큼 들어갈 여지가 넓어진다고 보면 대과가 없다. 

아무튼 황제가 죽으면 인근 제후국들한테도 이런 소식이 공식으로 전해진다. 그때는 상대국에 주재하는 공식 외교사절이 없으니, 이런 소식은 정식 사신 파견을 통해 이뤄진다.

이 소식을 듣고서는 제후국에서 조문사절단을 꾸리게 된다. 이 조문사절단도 구성이 복잡한데 거개 두 가지 이상으로 구성된다.

첫째 황제가 죽었으니 조문 사절단이 하나요, 둘째 새로운 황제가 등극했으니 새로운 황제 즉위 축하사절단이 하나다. 이 각각이 따로 움직인다. 조문하는 놈이 축하까지 할 수 없어서 그런 것이다. 

반대 또한 마찬가지라, 제후국왕이 죽으면 황제가 조문사절단을 보낸다. 단, 이 제후국이라 해도 급이 있어 적어도 조선왕조 정도 되면 대접이 남다르다. 
 



그렇다면 국내는 사정이 어떤가?

이것도 등급에 따라 달라서 고위직이나 저명한 학자가 죽으면 임금이 조회를 파하고 며칠간 특별 휴가를 내서 애도기간으로 선포한다. 이 기간 동안 휴무하게 된 관원이나 그에 버금하는 사람들은 상가를 찾아 상주를 조문해야 한다. 이런 사람 장례는 문전성시를 이룬다. 

문제는 조문을 할 때 빈손으로 가는 경우가 없다는 사실이다. 각종 물품을 바리바리 싸들고 간다.

요새는 이것이 현금으로 통일되니깐 엄청나게 편리한 세상이기는 하지만, 저때만 해도 보통은 물건을 들고 가기 마련이라, 장송 의식에 필요한 물품들을 집중으로 들고 가게 된다. 

이걸 부의라 한다. 권력에 따라 이 부의품이 쌓이는 정도가 달라서 묵자를 보면 이 양태를 비판하는 구절이 발견된다. 

또 아무리 시대정신을 반영해 그것이 심하다 해서 간단하게 장사하라는 명령이 줄기차게 내려오고, 죽는 사람이 그렇게 유명하기도 하지만, 천만에, 박장이니 후장은 상대적인 개념에 지나지 않아서 박장이라 해도 기본으로 해야 할 것은 하기 마련이라,

조조? 간단히 장사하라 했지만, 막상 드러난 그의 무덤은 적지 않은 도굴피해를 봤지만, 적지 않은 유물이 출토된 이유다. 

국가에서 내리는 부의품도 두 가지가 있다. 첫째 왕이 개인으로 내리는 것이 있어 내탕금에서 내는 것이다. 실은 이쪽이 더 부피가 크다. 둘째, 국가에서 공식으로 내리는 것이 있다. 이건 규정이 있어 그에 따른 물품을 지급받는다. 

다시 빈, 곧 조문기간으로 돌아가면, 무덤에 매장하기까지 시신은 임시 거처에 보관하기 마련인데, 이를 빈전殯殿이라 하며 요새는 빈소殯所라 하지만, 이것도 권력자별 명칭에 차이가 있어 임금의 경우 찬도전이니 뭐니 해서 거창하기만 하다. 보통은 궁궐 한 쪽 건물이라든가 마당 한쪽에다가 임시로 마련한다. 

이때 빈 기간에 따라 시체의 부패를 막거나 늦추는 것이 관건이다. 공자는 3년상을 제창했지만, 이게 말이 3년이지 미친 짓이라, 그것을 단축하고자 하는 갖은 논리가 개발된다. 3년은 말뿐이었고, 그렇게 되지 않은 이유는 시체 썩음 때문이었다. 

죽음이 한여름이면 반나절도 되지 않아 파리가 끓고 구데기가 들끓는다. 이걸 막는다고 냉장시절이라 해봐야 이렇다 할 시설이 없는 그때는 간단해서 결국 얼음을 시체 밑에다 깔고 위에다가 소금간을 치는 일밖에 없었다.

그래서 버텨내는 데는 한계가 있어 그래서 흔히 보이는 표현이 시체에서 구더기가 쏟아져 나왔다는 말이다. 

제아무리 얼음을 깔아도 시체는 결국 썩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전통 빈소는 누구나 경험이 있겠지만, 그 특유한 냄새가 있었으니, 이건 딴 게 아니라 시체가 썩어가는 냄새 그것이었다. 

황제는? 임금은 몇 개월? 빈소에 모신다? 택도 없는 소리다. 의례가 규정하는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그것을 조절하고자 하는 타협도 이뤄지는데, 실제 시체는 어딘가에 묻어 버리고 신주를 안치한 빈소만 만들어 놓는 일도 개중 하나다. 

한국농어산촌 사회에서 실은 얼마전까지만 해도 이랬다. 시체는 사흘 혹은 나흘만에 묻어버리고 빈소는 집안에다 차려놓고 3년간 살아계신 것으로 여겨 매일 세 끼 식사를 올린 것이다. 

우쒸, 애초 이런 얘기들로 샐 예정은 아니었는데 너무 샜다. 

일단 시리즈로 삼아 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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