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수사(宿水寺)는 경상북도 영주시 순흥면 읍내리에 있던 신라시대 사찰이지만 전해지는 기록이 거의 없어 잘 알려지지 않았다.
더욱이 사지 위에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 현재 소수서원)이 건립된 이후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사액서원으로 주목받았던 까닭에 그 이전에 있던 숙수사는 그다지 주목받지 않았다.
숙수사에 대해서는 고려~조선시대의 단편적인 기록과 당간지주를 비롯한 몇 기의 석조유물이 전하고 있어 사찰이 있었음을 짐작하는 정도다.
그렇다면 지금 소수서원에는 숙수사의 흔적이 얼마나 남아 있을까?
고려시대 숙수사 관련 기록은 지곡사(智谷寺) 「진관선사오공탑비문(眞觀禪師悟空塔碑文)」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비문의 내용에 따르면, 진관선사는 고려시대 선승으로 신덕왕 1년(912) 출생하여 광종 15년(964) 입적까지 많은 행적을 남기고 있다.
특히 태조 23년(940) 봄에 중국 유학길에 올라 절강성(浙江省) 서쪽에 있었던 용책사(龍冊寺) 도부(道怤) 스님을 찾아가 수행한 뒤 순례하고 정종 1년(946) 귀국하여 정종의 명에 따라 흥주(興州) 숙수선원(宿水禪院)의 주지로 임명되어 광종 1년(949)까지 약 4년 동안 머물며 주석했다는 내용으로 보아,
숙수사는 고려 초기 왕의 명으로 주지가 임명되는 국찰로서의 지위를 유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正宗文明王徵住興州宿水禪院莫不施四生之樂石盡絶沉痾架六路之津梁咸歸正道己酉...”)
숙수사와 관련된 다른 기록으로는 「임경식묘지명(林景軾墓誌銘)」(1161)에서 확인된다.
이 묘지명은 고려시대 형부우사원외랑(刑部右司員外郞)과 전라도춘하안찰부사(全羅道春夏按察副使) 등을 지낸 청백리 임경식(1099~1161)의 묘지명으로
이에 따르면 임경식은 고려 의종 때 관직을 두루 거친 인물로 슬하에 자식이 3명 있었다고 전한다.
그 중에서 “둘째 유승(惟勝)이 머리를 깎고 중대사로 숙수사 주지로 있다"는 내용으로 고려 중기까지 숙수사가 건재했음을 알 수 있다.(“...女而生四男三女長子軌妙年擢第曾任江華縣尉次子惟勝落髮以 重大師住持宿水寺次子琚以...”)
조선시대 이후 숙수사와 관련된 기록 중『무릉잡고(武陵雜稿)』에서는 안향이 소년시절 이곳에서 독서하였다고 한 것으로 보아 고려 후기까지 법등이 이어졌던 것으로 보인다.(“公之故居 在順興廢府城南 毀瓦頹垣已無可尋 新廟在城北 卽宿水寺舊址 相望僅一牛鳴地 公少時嘗讀書于此 愈不能不爲之興懷 竹溪繞其左 小白雄其右 雲山原水 誠不讓廬山”)
이후 『동문선(東文選)』을 비롯하여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순흥군읍지(順興郡邑誌)』 등에 숙수사가 폐사된 것으로 나와 있다.
숙수사의 정확한 폐사 시기는 알 수 없으나, 1542년 백운동서원이 건립되면서 폐사된 것이 아니라 그 전에 이미 폐사된 터에 서원을 건립한 것으로 생각되는데,
이와 관련해서 조선초기 순흥지역에서 발생하였던 ‘단종복위운동’이 주목된다.
세조는 어린 조카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를 찬탈하였는데 집권을 정당화하기 위해 정적들을 제거해 간다.
세조의 넷째 동생인 금성대군 역시 단종 3년(1455) 왕자의 신분을 빼앗기고 그해 6월 반란을 도모했다는 핑계로 삭녕(朔寧, 경기도 연천)으로 귀양보내진다.
세조 2년(1456) 6월에 통칭 사육신 사건으로 불리는 ‘단종복위운동’이 발생하자 1456년 금성대군은 순흥으로 유배되고, 이후 순흥에 유배된 금성대군이 여러 번 역모를 꾀했다는 상소가 올라오자 세조 3년(1457) 금성대군은 결국 사사(賜死)되었다.
이 사건으로 ‘순흥도호부’는 폐부(廢府)되어 토지와 백성이 풍기군, 영천군, 봉화현으로 나누어 혁속(革屬, 본 고을을 다른 고을에 붙임)되었는데, 토지만 혁파된 것이 아니라 창고와 관사를 파괴하고 그 터를 허물어버리는 등 도호부 전체가 참화를 당하게 되었다고 한다.(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世祖實錄』卷 8, 世祖 3年 8月 癸巳條 및 『新增東國輿地勝覽』古跡條 참조.)
이처럼 도호부 전체가 사라진 참화의 크기로 미루어 볼 때, 숙수사 역시 이 당시에 소실되었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생각된다.
물론 조선시대에 유학자들이 사찰을 부러 폐사시키고 그 부재를 활용해서 유교 건축을 지은 사례는 전국적으로 많이 볼 수 있다.
그러나 위와 같이 숙수사의 폐사 시기를 추정해보면, 숙수사는 단종복위운동으로 인해 폐사되었고, 이후 그 터에 남아있던 부재를 활용해서 서원을 건립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제 본격적으로 숙수사의 흔적을 살펴보면,
먼저 소수서원에 들어서면 이곳에 사찰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첫 번째 유물을 만날 수 있는데, 보물 제59호로 지정된 숙수사지 당간지주이다.
그리고 관리사무실 앞 마당에 석등, 석조광배편, 불상대좌, 계단 소맷돌 등 여러 석부재를 볼 수 있다.
석등은 서원 안의 관리사무실 앞마당에 다른 석조물들과 함께 놓여 있다.
현재는 기단 하대석, 간주석 및 옥개석만 남아 있다.
석조광배편과 2점의 불상대좌는 관리사무실 내부에 있었고 야외에는 복제품이 있었는데, 최근에는 모두 석등 옆으로 옮겨져 있다.
석조광배편은 일부가 파손되었으나 3구의 화불이 조각되어 있는데, 크기는 약 15cm 정도이다.
이 광배편은 전체적으로 볼륨감이 느껴지는데, 특히 화불의 경우 7~8cm 정도 앞으로 나와 있어 매우 입체적으로 보이는 것이 특징이다.
불상대좌는 모두 5점이 확인되는데, 지대석, 하대저석, 하대석, 상대석 등으로 하대저석의 경우 2매로 분리된 채로 확인되고 있다.
이 불상대좌의 부재들은 지락재(至樂齋)의 초석으로 사용되거나, 문성공묘(文成公廟)로 들어가는 문 앞에 놓여서 디딤돌로 사용되고 있다.
이 하대저석 측면에는 화문이 장식되어 있는데, 인근 비로사에 있는 것과 유사하다.
연화문으로 장식된 불상대좌 하대석과 상대석 역시 마당 야외에 전시되어 있는데, 하대저석 및 복련석과 앙련석의 조각양식 및 크기로 미루어 볼 때, 비록 중대석이 결실되었으나 하나의 불상대좌를 이루었던 부재임을 알 수 있다.
이 외에도 이전에 있었던 건축부재를 활용하여 건물 초석으로 사용했음을 볼 수 있다.
마당에 있는 석조부재 중 건축부재로 계단 소맷돌도 볼 수 있다.
이 소맷돌의 특징은 면석을 버선코 모양으로 간결하게 치석하였는다는 점인데, 이는 불국사 대웅전 계단 소맷돌과 강한 친연성을 보인다.
이같이 계단 소맷돌을 한 개의 돌로 조성하여 면석과 지대석을 새김한 경우는 8세기 중엽에 제작된 것으로 알려진 불국사 대웅전의 소맷돌을 제외하면 통일신라시대의 다른 사찰 계단에서는 확인되지 않는다.
숙수사지 출토 건축부재 중에서 돌못으로 추정되는 치석재도 확인된다.
이 돌못은 문성공묘의 기단석 배면에 1기가 남아 있다.
이러한 돌못은 겉으로 드러나는 부위에 비해 뿌리가 긴 장대석에 턱을 마련하여 노출부가 뿌리보다 넓게 처리함으로써 석축에 삽입 시켰을 때 이웃한 석재가 턱에 걸려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하는 부재로 신라시대 사찰 건축을 비롯한 다양한 분야에서 사용된다.
특히 대석단을 조성한 기단공사에서 주로 사용되었으며 감은사지, 석굴암, 불국사, 영암사지, 안압지, 월정교지 등지에서 확인되는데 사찰의 경우 대부분 왕실과 관련이 있는 사찰이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최근 소수서원을 비롯해 우리나라 서원이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면서 사람들의 관심도 높아지고 있다.
물론 소수서원 그 자체로도 의미가 있지만, 만약 이 글을 읽고 소수서원을 방문한다면 소수서원 곳곳에 남아 있는 숙수사의 흔적을 찾아 보는 것도 소수서원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다.
* 이 글은 제가 쓴 논문인 <榮州 宿水寺址 석조유물에 대한 考察>(<<사림>>40, 수선사학회, 2011)에서 발췌하여 작성했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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