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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 Reading of History and Histories

스포츠광 고려 의종의 대중정치와 격구

by taeshik.kim 2019. 3.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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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제18대 임금 의종(毅宗, 재위 1146~1170)은 은닉(隱匿)해야 하는 동아시아 군주상의 이단異端이다. 그는 스포츠 광이다. 폴로 경기에 미쳐 날뛰며 날마다 격구를 했다. 밤을 밝혔다. 궁성 사방에다가 격구장을 만들었다. 이는 대간들의 반발을 불러왔다.

이는 군주는 자고로 이러해야 한다는 무언의 합의에 대한 배신이었다. 군주가 구중심처를 박차고 나가 대중 앞에 설 때 이를 가장 두려워한 자들이 있다. 대중 앞에 선 군주는 대중과 직거래를 한다. 그들의 박수갈채는 관료들에겐 위협이었다.

의종이 결국엔 쫒겨난 까닭이다. 


당 현종(唐玄宗) 격구도(擊球圖). 당명황격구도(唐明皇擊球圖)라고도 한다. 송대(宋代). 세로 67㎝. 가로 52.8㎝. 중국역사박물관 소장.


그의 이단적인 행보를 《고려사절요》 제11권 의종 장효대왕(毅宗莊孝大王)에서 추려본다. 


(의종은) 휘(諱)가 현(晛)이며, 자는 일승(日升)이요, 그 이전 휘가 철(徹)이니, 인종(仁宗)의 맏아들이다. 어머니는 공예태후(恭睿太后) 임(任)씨인데, 인종 5년 정미(1127) 4월 경오일에 출생하였다. 성질이 놀이와 잔치를 좋아하고, 여러 소인과 친압하여 마침내 화란을 당하였다. 24년간 왕위에 있었고, 수는 47세이었다. (총평)


○ 여름 4월에 외제석원(外帝釋院)에 거둥했다. 이로부터 사원(寺院)에 거둥하여 논 일을 이루 다 기록할 수 없다. 

○ 5월에영통사(靈通寺)에서 후사를 점지해 주기를 기도하여, 화엄경을 50일 동안 강(講)하였다. ○ 대간이 소를 올려 간한 일에 왕이 답하지 않아 대간이 집으로 돌아가니, 왕이 이에 다시는 격구하지 않을 뜻으로 구장(毬場, 격구하는 운동장)을 어사대에 내렸다. 어사대에서 조서를 받들어 수창궁(壽昌宮) 북문을 잠그고 군소배들의 출입을 금하였다. 왕이 북원(北園)에 나와 놀며 좌우 사람에게 이르기를, “내 공[毬]치는 기술을 다시 시험하지 못하리로다." 하고는, 조금 있다가 공을 치니, 이에 따를 자가 없었다.

(9월) ○ 서루(西樓)에 거둥하여 격구(擊毬)를 관람하였다.○ 겨울 10월 1일 을미에 왕이 서루에서 격구를 관람하였는데, 뇌성과 함께 우박이 내렸다. 태사가 아뢰기를, “양(陽)이 약하고 음기(陰氣)가 역(逆)하기 때문에 우레가 소리를 발하는 것이니, 반드시 숨은 음모가 있는 것입니다. 만약 강포한 자를 물리치고 노약자를 부지하며 현량(賢良)한 사람을 등용하면 구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였다.

○ 서루에 나가 무려 4일 동안이나 격구를 관람하였다

○ 친히 노인과 효자ㆍ순손ㆍ절부ㆍ의부(義夫)들을 격구장으로 불러서 음식을 먹이고 홀아비ㆍ과부ㆍ고아ㆍ무의탁자와 중한 병이 든 환자에게 물품을 내렸다. 

(11월) ○ 왕이 북원에서 격구하였다. (정묘 원년<1147>, 송 소흥17년ㆍ금 황통 7년) 


격구


○ 12월에 왕이 북원에서 격구하였다.(무진 2년<1148>, 송 소흥 18년ㆍ금 황통 8년)


○ (2월에) 날쌔고 용맹 있는 기사(騎士) 18명을 뽑아 뒤뜰에서 격구하게 하고 관람하였다. 3월 ○ 서루(西樓)에 나가 격구하는 것을 사흘 동안 관람했다. 9월 ○ 서루에 거둥하여 격구와 희마(戲馬, 말 타고 재주하는 놀이)를 관람하였다. ○ 지문하성사 최유청, 어사대부 문공원 등을 불러 술을 하사하고, 이윽고 격구를 관람하였다. ○ 서루에 거둥하여 이틀 동안 격구를 관람하였다.○ 관덕정(觀德亭)에 거둥하여 군사를 사열하고 물품을 차등 있게 내렸다. ○ 재신과 추신 및 시신(侍臣)과 더불어 연회하였다. ○ 군사를 사열하였다.(기사 3년<1149>, 송 소흥 19년ㆍ금 해릉왕(海陵王) 천덕(天德) 원년) 


가을 9월 ○ 북원에 구장(毬場)을 쌓았다. ○ 겨울 10월에 동교(東郊)에서 군사를 사열하였다. 11월 ○ 강안전(康安殿)에 나가 내시지후(內侍祗候) 이하에게 격구를 하게 하였다.(경오 4년<1150>, 송 소흥 20년ㆍ금 천덕 2년) 


격구


○ 8월에 간관과 시어사 김양(金諹) 등이 합문에 엎드려 사흘간 시사를 논하여 간하였으나, 답하지 않았다. 성재(省宰)들이 자신에게 죄를 달라고 청하고 일을 보지 않으니, 문공원ㆍ유필ㆍ김영석ㆍ최자영 및 간관 김자의(金子儀)ㆍ왕식ㆍ박수ㆍ이원응ㆍ이양신(李陽伸)ㆍ윤인첨(尹鱗瞻), 대관 최윤의ㆍ김양ㆍ민각(閔慤)ㆍ한정(韓靖)을 불러 위안하고 타일러서 일을 보라 하였으나, 모두 조(詔)를 받지 않고 밤 2경에야 비로소 물러났다. 성재(省宰)와 대간도 부름을 받고 궐내로 가서 처분을 기다렸으나, 모두 답하지 않으니 성재와 어사대부는 먼저 물러갔다. 왕이 기사를 뜰로 불러서 북을 치며 격구하였다. 정언 이지심(李知深)이 합문에 엎드려 이틀 동안을 극력 간쟁하였다. ○ 왕이 북원에 나와 놀고, 기사(騎士)에게 명하여 격구하게 하였다.(신미 5년<1151>, 송 소흥 22년ㆍ금 천덕 3년)



4월 ○ 간관이 합문에 엎드려서 격구하는 것을 간하여도 듣지 않으니, 간관이 드디어 한림원에서 유숙하였다. 왕이 술을 내려 위안하며 타이르고, “말한 바가 지극히 절실하니, 어찌 감히 따르지 않겠는가." 하고, 다음날 여러 말[馬]들을 모두 내보내고 일관에게 명하여 북문을 폐쇄하였다.(임신 6년<1152>, 송 소흥 22년ㆍ금 천덕 4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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