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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 Reading of History and Histories

원화 폐지와 그에 따른 화랑 설치 그 비밀이 일거에 풀린다

by taeshik.kim 2019. 4.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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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가 화랑(花郞)을 설치한 시점을 두고 논란이 적지 않았으니, 그것은 다른 무엇보다 다음 《삼국사기》 신라본기 진흥왕 37년(576) 조 다음 대목에서 비롯한다. 


"三十七年春 始奉源花" (37년 봄에 처음으로 원화<源花>를 받들었다) 


이 대목이 《해동고승전海東高僧傳》에는 이렇다. 


"三十七年, 始奉原花爲仙郞" (37년, 처음으로 원화<原花>를 받들어 선랑<仙郞>으로 삼았다) 


그에 대해 《삼국유사》는 권 제3 탑상(塔像) 제4 〈미륵선화·미시랑·진자사(彌勒仙花 未尸郞 眞慈師)〉에서 진흥왕 37년에 원화 혹은 선랑, 곧 화랑을 처음 설치한 문제를 지적하면서, 연대가 틀렸다고 지적질했으니, 


"國史 眞智王大建八年丙申 始奉花郞 恐史傳乃誤"(국사에서 이르기를 진지대왕 대건 8년 병신에 처음으로 화랑을 받들었다 했거니와, 이는 아마도 사전<史傳>의 잘못이리라.) 


다른 무엇보다 원화가 폐지되고 그 후속으로써 화랑이 처음 설치되었다는 진흥왕 37년(576) 이전에 이미 사다함(斯陀含)이 화랑으로써 그 낭도들을 거느리고써 561년 혹은 562년에 그 총사령관 이사부(異斯夫)를 종군해 혁혁한 전과를 냈기 때문이었다. 


드라마 선덕여왕 한 장면. 화랑세기 묘사를 보면 미실과 설원랑은 저리 생겼을 가능성이 크다.



이런 지적은 오랜기간 신라사학계에서는 탁견으로 치부되었으니, 그래 일연 스님이 제대로 지적질했다 해서 아무도 그에 이의를 제기하지 아니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삼국유사》는 저 기록이 착란임을 알지 못했다. 저 《삼국사기》와 《해동고승전》은 실은 다음 기록을 전재하는 과정에서 저리 착란이 빚어졌기 때문이다. 


"始奉薛原爲花郞" (처음으로 설원랑薛原郞을 받들어 화랑으로 삼았다) 


이것이었다. 설원랑은 나중에 그 생김새가 아이돌 같다 해서, 기생 오래비 같다 해서 설화랑薛花郞으로 이름까지 바꾼다. 

설원랑이 곧 설원랑임은 기존에 알려졌으나, 이 개명 사실은 《화랑세기》에 명확히 보인다. 



미실은 절세의 미인이었다.



이때 설원랑은 애초 화랑이었다가 진흥왕 후궁 미실美室이 권력을 농단하면서, 그 훨씬 전에 폐지된 원화 제도를 부활하고, 그 부활한 제1대 원화로 재임하다가 밀려나고서 다시금 화랑 자리를 찾으니 그때가 진흥왕 37년이었다. 


따라서 저 《삼국사기》와 《해동고승전》가 말하는 원화 폐지와 그에 따른 화랑 설치 기사는 실은 신라가 처음 화랑을 설치한 연대가 아니라, 그것이 부활된 사실을 말하는 것이었다. 


천하디 천한 혈통을 딛고서 미실을 엎고서 출세가도를 달리고 권력을 농단한 설원랑은 꽃미남이었다. 이 친구 전노민이 실제의 설원랑에 가깝다.



이 모든 의문을 《화랑세기》가 단칼에 풀었다. 신라사 천년의 혼란 혹은 착란을 천년만에 푼 것이다. 


뭐, 이래도 가짜라 하니, 뿡알을 보고도 그것이 수컷임을 아지 못하고, 암수를 구별하지 못하니 더 말해서 무엇하라? 


드라마 선덕여왕에서 끝까지 미실에 충성하는 인물로 등장한 설화랑을 연기한 전노민. 그는 김보연 누나랑 결혼했다가 이혼했다나 어쨌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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