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 송산리 고분군 중 무령왕릉 출토 돌판 두 장을 우리한테 익숙한 종이책 혹은 공책으로 환원하면 이렇다.
이 한 장을 만들기 위해 나로서는 20년을 쏟아부었다.
보다시피 이렇게 종이책으로 묶어 놓으니, 그 특색이랄까 특징이 확연히 드러난다.
무덤방으로 통하는 무덤길에 놓인 상태로 발견된 돌판은 두 장. 이 돌판은 각각 앞과 뒤로 텍스트를 적었다. 따라서 이들 두 돌판은 전체 4쪽이다. 그 쪽마다 순서대로 ①, ②, ③, ④쪽이라는 번호를 붙였다.
제②쪽 소위 묘지墓地 간지방위표干支方位表
①과 ②가 돌판 한 장이라, 그 앞뒤다. ③과 ④는 다른 돌판이라, 역시 그 앞과 뒤다.
이를 하나로 이어붙여 놓으니, 공책이 저런 식으로 펼쳐진다.
이렇게 보면, 이 돌판 두 장이 첩식帖式 문서라는 점이 확연히 드러난다. 간단히 말해 4폭 병풍이다.
이 두 장짜리 4쪽 전체가 무령왕릉 묘권墓券이다. 묘권이란 사람이 죽어 그를 매장하기 위해 그 묘자리를 조성한 내력을 정리한 문건이다.
제①쪽 무령왕(武寧王) 묘권(墓券)
한데 저 4쪽은 문서 성격이 조금씩 다르다. 그것이 묘권이라는 전체 문서를 구성하는 일부임은 분명하나, 개별 쪽수에 적힌 문서 내용은 상이하다는 사실은 다른 무엇보다 각 쪽이 그 자체로 완결한 텍스트라는 점에서 그렇다. 텍스트를 적어가다가 해당 주제를 끝내고는 나머지는 공란으로 비워뒀다.
따라서 무령왕릉 묘권은 첩식문서 뭉치 혹은 책(冊)으로 4쪽 짜리 개별 문건 앤솔로지다.
무령왕릉 무덤길에서 발견된 묘권墓券 돌판 두 장
①과 ②와 ③쪽이 무령왕이 죽어 매장할 때 작성한 문서이고, 마지막 ④쪽이 나중에 무령왕비가 죽어 추가로 보충한 문건이다.
사진에서는 확실히 드러나지 않으나, ①과 ②와 ③쪽 문건은 제대로 썼는데, 유독 ④쪽 문건만큼은 텍스트 방향이 왼쪽으로 오른쪽, 그리고 무엇보다 아래서 위로 적었다. 다시 말해 우리한테 익숙한 전통시대 동아시아 텍스트와는 전연 반대로 문서를 작성했다.
문제의 ④쪽 문서 마지막은 '如左(여좌)'라는 말로 끝난다. 여좌란 글자 그대로 "왼쪽과 같다"는 뜻이다.
지금까지는 왜 유독 ④쪽 문서만이 거꾸로이고, 그 마지막 구절 '如左(여좌)'가 무슨 의미인지 도대체 종잡을 수가 없었다.
그런 의문은 이 문서를 저런 식으로 4쪽짜리 병풍 문서로 펼쳐놓으니 비로소 완연하게 해명한다.
무덤길에서 무덤방을 바라본 무령왕릉 내부
④쪽 문서가 말하는 '如左'의 左는 바로 실제 그 왼편에 자리잡은 ③번 문서다. 이 ③번 문서가 바로 소위 매지권買地券이라 해서 죽은 무령왕이 혼령이 되어 자기 집(무덤)으로 쓸 땅을 지하세계를 관장하는 신들한테 돈을 주고 산 토지매매문서다.
따라서 ④쪽 문서는 나중에 죽은 무령왕비는 먼저 죽은 남편 무령왕이 이미 옛날에 무덤으로 쓸 땅을 이미 샀으므로, 왕비는 따로 그런 절차가 필요없다. 그런 사실은 "왼쪽과 같은" 문서로 증명이 된다는 뜻이다.
이 평이한 비밀을 푸는데 나로선 20년이 걸렸고, 선학들은 전연 눈치도 채지 못하고 눈만 멀뚱멀뚱거리며 왜 이렇지? 했을 뿐이다. 그 체증을 한 방에 내려버렸다. 무령왕릉이 발견된지 근 반세기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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