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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이모저모

진골정통과 대원신통, 근친혼사회가 족외혼을 유지하는 장치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20. 11.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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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를 비롯한 한국고대사회에 광범위한 근친혼은 그런 생각을 퍼뜨린 주범 중 하나가 중국에서 비롯하는 유가 논리였지만 그런 중국도 의외로 근친혼이 광범위했으니 이들한테 근친의 기준은 같은 성씨였다.


by 이종욱



바로 이 틈바구니를 근친혼이 예리하게 파고 들거니와 고모류 자식을 받아들이는 일이 한 예다. 부계 중심으로는 명백히 다른 성씨지만 생물학적으로는 명백히 같은 피다. 그럼에도 성씨가 다르다는 이유로 근친이라는 혐의를 피해간 것이다.

신라는 근친혼이라 하지만 이 근친혼은 배우자는 같은 부족에서 취하지 않는다는 인류학의 오랜 발견을 언뜻 배신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른바 족내혼族內婚에 대한 족외혼族外婚이다.

한데 화랑세기가 제공하는 신라사회는 저 오랜 발견을 단 한 치도 배신하지 않는다.

근친혼과 족외혼은 명백히 상극인 듯 보인다. 하지만 놀라운 점은 극심한 근친혼이 족외혼과는 별개로 완벽히 작동한다는 점을 화랑세기는 증명한다.


by 이종욱



신라는 어떻게 족외혼과 근친혼을 조화했을까? 다시 말해 극심한 근친혼을 유지하면서도 시종일관 족외혼을 유지했을까?

모계 혈통의 발명이었다. 왕가를 기준으로 할 적에 신라는 왕비를 공급하는 혈통을 끊임없이 발명해갔다. 이 모계로만 전승하는 왕비 공급 혈통을 화랑세기는 인통姻統이라 했다.

이 인통으로 화랑세기에 등장하는 양대 혈통으로 조문국 왕실에서 비롯하는 진골정통眞骨正統이 있고 왜 왕실에서 비롯하는 대원신통大元神統이 있다. 이 둘은 엄마 딸 손녀로 계승한다. 남자는 1대에 한해 그 혈통을 계승한다지만 솔까 남자는 관심이 없다.

보다시피 이 인통은 철저히 신라사회 밖에 위치한다. 이는 결국 철저한 족외혼을 유지하기 위한 장치임을 간파한다.

이렇게 됨으로써 신라는 시종일관 족외혼을 유지하게 된 것이다.


by 이종욱



유의할 것은 그런 인통도 복수화한다는 점이다. 저 인통 중 진골정통이 상대적으로 오래 되었으니 그걸 법제화한 이는 미추왕이었다고 한다. 미추 이전엔 족외혼이 어떤 방식으로 작동했는지는 알 순 없지만, 다른 인근 왕국에서 틀림없이 왕비를 구했을 것이다.

조문국 정벌을 계기로 미추가 앞으로는 조문국 후손이 아니면 왕비로 들이지 마라 법으로 못을 박은 것이다.

그런 법령 혹은 관습이 내물 실성 자비마립간 즈음해 요동을 친다. 倭 왕실이 뛰어든 것이다. 고리는 미사흔이었다.


신라왕가에 왕비를 공급하는 외부 혈통. 이는 결국 신라를 중심으로 하는 봉건지배질서다. 이것이 임나일본부가 상징하는 倭 왕실은 거꾸로 해석하는 빌미가 된다.



오랜 왜 인질 생활에서 왜 왕실 공주를 농락한 그는 이 공주를 데리고 귀국했다. 이 공주한테서 씨가 퍼져나갔으니 이들이 훗날 진골정통에 맞서는 일대 세력을 형성하게 된 것이다.

이렇게 인통 역시 고정한 것이 아닌 역사적이었다.

인통은 모계로만 따지고, 그 모계는 철저히 신라사회 밖에 뿌리가 있었으니 언제나 신라 왕가는 족외혼이었다.

근친혼과 족외혼이 어찌 공생하는지를 보이는 위대한 보기다.

***

 

 

이는 진흥과 숙명의 혼인 관계를 도식화한 것이다. 보다시피 진흥은 어머니 지소의 강요에 의해 같은 어머니에다가 아버지만 다른 숙명과 혼인해서 정숙이라는 아들을 낳았다. 

 

지소가 이렇게 자기 딸을 배필로 정한 까닭은 그 자신이 진골정통으로서, 그 혈통을 물려받은 딸 숙명으로 하여금 왕비 자리를 잇기 위함이었다. 

 

*** 

 

족내혼과 족외혼은 간단히 아래와 같이 정리한다. 

 

1. Endogamy 족내혼 族內婚
- 부족 내부에서 배필을 구한다. 
- 따라서 근친혼 consanguineous marriage 이 많다. 

2. Exogamy 족외혼 族外婚 
- 부족 외부에서 배필을 구한다. Ex. 동성동본 혼인금지 
- 근친혼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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