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서 나는 순망치한이라는 논리로 475년 신라가 쓰러져가는 백제를 구원하고자 1만 명에 달하는 대군을 백제로 파견했다고 했다.
그걸로 모든 의문이 명쾌히 해명되는가?
앞서 말했듯이 저 파견이 신라로서는 실상 고구려와의 전면전 선언이었다.
고구려가 7일 낮 7일 밤만에 백제 왕도 한성을 함락하고 개로왕을 참수한 다음 그대로 한성에 주둔한 상태였다면 한성에서는 2차 대전이 벌어질 것임은 한밤중 불을 보듯 뻔했다.
그걸 모를 리 없는 신라 조정과 자비마립간은 왜 고구려와의 전면전을 불사했는가?
첫째 신라 내부의 자신감이었다. 우린 어느 누구와 붙어도 그네들을 깨뜨린다는 자신감이 있었고 그것이 아니라 해도 이참에 고구려를 확실히 꺾어놔야 한다는 매파가 득세했다.
나는 그 진원지로 벌지와 덕지를 주목해야 한다고 본다. 이 둘은 화랑세기에 의하면 박제상 미망인 치술공주의 외손자들이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이들은 대 왜국전에서 혁혁한 전과를 낸 전쟁영웅이며 신라사에서는 이들이 역사의 전면에 등장함으로써 비로소 왜국이 신라에서 물러났다.
이들이 당시 신라 조정을 장악한 상태였으며 특히 군사 분야에서 이 둘은 훗날 김유신과 같은 위상을 자랑했다.
둘째 신라와 백제 관계의 당시 특수성이 우리가 생각하는 이상으로 깊었다.
흔히 저 무렵 두 나라 관계를 고구려 남진을 저지하고자 하는 혼인동맹이라 이야기하지만 이것으로는 저 사건을 해명할 수는 없다. 단순히 동맹국이 침략받았다 해서 만명을 순식간에 보낸다?
이는 왜 구원군 요청 비상 특사로 문주가 신라로 가야 했는지와 연동해서 접근해야 한다. 삼국사기엔 문주를 신라로 보내면서 하는 개로왕의 비장한 말이 의미심장하게 채록됐다.
간단히 추리면 난 도림한테 속았으나 넌 그러지 마라고 한다.
우리가 지금 품는 의문은 신라가 훗날 한강 유역을 직접 지배하는 논리로 작동한다.
신라는 성왕과 백제를 배신하고 한강 하류 유역을 탈취한 것이 아니다.
그것을 점령한 이유는 바로 연고권이었다. 본래 한강 하류는 우리 땅이라는 믿음과 근거를 들이대어 점령했을 뿐이다.
신라는 우리가 생각하는 이상으로 그 힘이 강대했다. 일통삼한은 훗날 등장한 통합논리라고 나 역시 한때는 그리 생각했지만 오판이었다.
한강 하류 유역은 신라 땅이라는 믿음이 신라로서는 확고했으며 그 확고성은 475년에 확인되었고 부용국 백제에 관리권을 위탁했다가 그곳을 백제가 고구려에 탈취당하자 그곳을 수복했을 뿐이다.
우리는 멍청하게도 왜 신라가 만명이나 되는 구원군을 파견했는지를 제대로 물은 적이 없다.
그래서 해명을 못한 것이다.
묻지 않으니 누가 대답해준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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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결단, 백제 구원병 1만의 무게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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