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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이모저모

신라의 결단, 백제 구원병 1만의 무게감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23. 5.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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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5년 백제가 실상 고구려에 멸망하고 개로왕까지 사로잡혀 참수된 참혹에서 우리가 또 한 가지 간과한 중차대한 사실이 있으니 이 난국에서 신라가 취한 자세다.

왕도가 포위된 위급한 상황을 알리면서 구원병을 청한 백제 문주한테 신라와 자비마립간은 물경 1만에 이르는 대군을 파견했다.

이 1만이 주는 무게감을 아무도 심각히 보지 않았다.

신라에 의한 일통삼한에 이르기까지 삼국이 총력전 체제에서 동원가능한 군발이 숫자는 3만~5만 명이었다. 일통삼한 전쟁 와중에 신라가 전국에서 징발한 군발이는 5만명에 지나지 않았다. 것도 보급부대까지 합친 규모다.


삼년산성



장수왕이 개로왕 목을 딸 때 동원한 군대도 3만이었다. 저 무렵 삼국 공히 국가 명운을 건 전쟁에 동원 가능한 숫자는 삼만이 최고였다.

광개토 담덕가 5만을 동원했네 하는 구절이 그 비문에 보이지만 개뻥 개구라 개소리에 지나지 않는다. 저 무렵 고구려가 박박 긁어낼 수 있는 군대는 3만이었다. 백제 신라 역시 비슷했다.

한데 급박한 소식을 접한 신라 조정은 긴급회의를 통하고 또 이를 자비가 최종 승인하는 모양새를 취해 1만 명 파견을 결정하고는 주로 고구려 백제 접경 지역 주둔군을 중심으로 한성 현지로 급파했다.

이는 신라로서도 일대 국운을 건 결정이었다. 신라가 왜 저럴 수밖에 없었는가? 백제가 무너지면 다음 타깃이 본인들인 까닭임을 직감으로 알았기 때문이다.

1만 명 파견은 신라로서도 대 고구려 전면 선전포고였다.

불행 중 다행으로 이 사건은 신라군이 한성에 도착했을 때는 고구려군이 퇴각하고 없었으므로 일단락을 고했다.

하마터면 신라와 고구려는 백제 한성 땅에서 한판 붙을 뻔했다. 한성 공략에 애를 먹고 기진맥진한 삼만 고구려군이 새롭게 도착한 신라 용병 1만이 자웅을 겨루는 희대의 장면이 펼쳐질 뻔했다.

저 무렵 신라군에는 벌지와 덕지라는 형제 전쟁 영웅이 수뇌진을 형성했을 것이다.

고구려군이 물러난 자리를 차지한 신라는 직후 백제를 부용국으로 접수하고는 빈 왕위를 누구로 채울 것인지를 잠시 고민하고선 기왕이면 우리한테 와서 도와 달라고 눈물 죽죽 흘리며 빌고 빈 문주가 여러 모로 쓸모 있겠다 생각해 그를 왕으로 옹립하라는 밀명을 계림에서 하달받은 현지 파견 사령관은 그 꼭두각시 왕을 데리고 웅진으로 남하한다.

웅진시대 백제는 신라의 부용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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