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냥·무용 모습 그린 1천500년전 신라 행렬도 나왔다
송고시간 | 2019-10-16 09:00
경주 쪽샘 44호분 토기서 발견…대형항아리 등 유물 110여점 출토
"인물·복식 묘사 구체적…고구려와 교류 보여주는 자료"
가설 덧집까지 씌워놓은 경주 쪽샘지구 44호분 발굴이 더디기만 한 게 아닌가 하는 아쉬움이 컸는데, 그런 중에서도 발굴이 계속된 모양이라, 이번에 괄목할 만한 성과가 나온 듯하다.
비록 토기에 새긴 그림이기는 하나, 지금껏 신라문화권에서는 보기 힘든 사냥과 무용 장면을 묘사한 소재라는 점에서 더 그렇다.
이런 그림만 보이면, 고구려 영향 운운하기도 하고, 실제 조사단에서도 그런 영향관계를 짚고 싶은 욕망이 있었던 듯하지만, 저런 그림은 실은 고구려만의 전매특허가 아니요, 동아시아 보편의 소재라는 점에서 나는 그것을 고구려와의 영향 관계로 짚는 견해는 배격한다.
신라가 외부와 접촉하는 창구 혹은 대상이 왜 고구려여야만 하겠는가? 중국을 기준으로 해도, 신라가 접촉하는 중국은 다양했다. 나는 언제나 장강 유역 강남과 한반도 교유를 주시하는데, 내 보기엔 이런 활발한 교유는 이미 기원전 3세기 무렵에는 완연했고, 이후에는 더욱 활발해져, 나는 한반도와 중국대륙 동해안 해안을 함께 묶는 환황해권 혹은 환서해권 문화설정을 해야 한다고 믿는 바이다.
그에서 주목할 고리가 바로 신선도교이거니와, 3세기 혹은 4세기 이래 도교로 완연한 모습을 갖추는 이 신선도교는 동아시아 보편 종교였다. 우리는 이를 언제나 샤머니즘이니 무속이니 하는 이름으로 부르지만, 택도 없는 소리다. 이 신선도교는 동시대 일본열도까지 장악하는데, 그것을 엿보게 하는 가장 중대한 고리가 이른바 삼각연신수경이다.
이 삼각연신수경은 절대의 소재가 서왕모와 동왕공이라, 이 둘은 신선도교에 대한 고려 없이 어찌 푼단 말인가?
이번에 조사한 쪽샘 44호분은 그보다 연대가 더 떨어지는 5~6세기 적석목곽분이라, 이 시대는 이미 신선도교가 도교로 발전한 시대이며, 이 도교가 상징하는 상장 의례가 일반화한 시대다.
저번 금령총 발굴에서 분명하게 되었듯이, 무덤 구역 중에서도 하필 북쪽에다가 제기를 잔뜩 묻거나 말대가리를 부장한 이유는 말할 것도 없이 희생은 북쪽 땅에다가 묻는다는 의례라든가 예기의 언설을 구상화한 것이어니와,
그런 특징은 이번 쪽샘 44호분 발굴에서도 유감없이 재증명되거니와, 그 호석 주변 구역 중에서도 왜 제기임이 분명한 대형 토기들을 북쪽 구역에다가 밀집해서 갖다 놓았겠는가?
의례? 장상례? 지금까지 한국고고학이 접근한 의례 상장례는 껍데기에 지나지 아니했다. 의례를 알고 예기를 알아야 하며, 무엇보다 순자를 읽고 소화해야 하며, 후대로 내려와서는 당육전이며 하는 각종 의례서가 구현하는 상장례를 광범위하게 수렴해야 하거늘, 이런 준비된 자들을 나는 듣도보도 못했다.
고작 하는 말이라고는 무령왕릉 3년상이 어떻고 저떻고에 지나지 아니하며, 것도 앵무새 되내이듯, 그것이 유래하고 태동하며 활개하고 후대 조선시대 상장례까지 이르게 광범위하게 전개한 상장 문화를 알지 못하니, 가묘를 썼느니 어떻니 저떻니 하는 낭설을 횡행한 것이다.
왜 말대가리를 금령총 호석 북쪽 외곽에 묻었겠는가? 취리산 회맹을 알아야 하고, 그것을 보고 취리산 회맹을 떠올려야 하며, 더욱 멀게는 선진시대, 그리고 진한시대 삽혈하는 전통을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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