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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이모저모

신라 신궁神宮의 실체(재론)

by taeshik.kim 2020. 8.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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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정에 출현한 팔각형건물터와 그 선대 원형 건물터

 

신라사, 아니 한국고대사 최대 미스터리 중 하나로 꼽히는 점이 신라가 소지왕 혹은 지증왕 시대에 시조가 탄강하신 곳에 건립한 신궁神宮의 실체가 무엇이냐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그에서 제사한 신격이 누구냐로 논쟁이 치열했으니, 혹자는 신라 건국시조 박혁거세라 하고 혹자는 김씨 시조 알지라 하며 혹자는 김씨 첫왕인 미추라 한다.

하지만 나는 이런 주장 모두가 틀렸다고 본다. 신궁의 주신은 박혁거세 엄마다.

그 이유는 인근 동아시아 문화를 비교하면 신궁 주신은 모조리 시조 엄마를 배향한 곳으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 사례를 볼작시면

첫째 중국이니 주나라 신궁은 그 시조 후직의 어미인 강원을 배향한 곳이고

둘째 고대 일본이니 이세신궁 주신이 바로 일본 천황가의 모계 뿌리인 아마떼라스노 오호미카미이며,

셋째 고구려이니 초기에 세운 신묘神廟 즉 신궁이 바로 고주몽 엄마 유화부인 사당이며

넷째 백제이니 온조 또한 그 어미 소서노가 죽으니 국모묘國母廟를 세워 배향했으니 이것이 신궁 아닌 무슨 개뼉다귀리오?

 

 

팔각형건물터 이전 원형건물터 심주心柱 자리



고로 신라 신궁은 주신이 박혁거세 엄마다.

이렇게 이해하고 보면 하필 그것을 세운 지점이 왜 시조가 탄강하신 곳인지를 단박에 이해할 수 있다.

엄마가 시조를 낳은 곳에 신궁을 건립했던 것이다.

나는 이와 같은 내 학설이 설혹 내 생전은 아닐지언정 사후에라도 궁극적이며 완전한 승리를 구가하리라고 본다.

(2013. 8. 18)

***

이에 아래와 같이 저 논지를 상술했다.

周代 神宮은 시경에 비궁閟宮이라 표기되거니와 후한시대 정현이 이를 풀기를 閟, 神也. 宮, 廟也라 했으니 신묘는 곧 신궁이다

이를 통해 신라에 왜 시조묘와 신궁이 따로 있는지를 해명한다.

 

팔각형건물터. 문무왕 무렵 축조다. 



시조묘는 2대 남해왕 때 그 아비이자 신라 시조인 박혁거세를 위해 건립하고 제사를 주관하는 제주로는 남해 여동생 아로를 앉혔으니 이것이 고대 일본 신궁에서 매양 발견되는 재궁齊宮 아니면 무슨 개뼉다귀리오?

시조묘는 남자 중심, 신궁은 여자를 배향하는 곳이니 그 신단 형식도 왕청나게 다르다.

시조묘가 고추라면 신궁은 움푹 들어간 구멍이 되어야 한다.

이런 기초적 이해가 있으면 경주 나정에서 발견된 신라 제사 유적이 바로 신궁이라는 사실이 싱겁게 끝난다.

발굴 조사 결과 나정에 첨 제사터가 들어서기는 5세기 후반, 그것이 문무왕 무렵에 팔각형 건물로 대체한다.

소지왕 지증왕 무렵에 들어선 신궁이 바로 나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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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신궁 이해를 위해서는 이런 비교사의 관점이 무엇보다 필요하다.

 

문무왕 무렵 팔각형건물터와 그 이전 소지~지증왕 무렵 원형건물터



하지만 지금까지는 고작 이세신궁 갖고 깔짝거렸지 그것을 주대의 비궁, 고구려 신묘, 백제 국모묘와 비교할 생각을 못했다.

인근 중국 일본 고구려 백제에 모조리 있는 왕가의 엄마 뿌리에 대한 국가 제단이 다 있는데 어찌 유독 신라만 없으리오?

화랑세기에 이르기를 소지왕비에서 쫓겨난 선혜왕비신궁제주로 갔다 했다

지증왕비 이름이 延帝연제, 다시 말해 신의 강림을 주관한다는 뜻이다.

나는 고대사가 퀴즈 풀기가 아니라고 본다

거기에는 지극한 상식만 필요할 뿐이다.

끊임없는 의문과 문제의식이 필요할 뿐이다.

***

같은 요지의 글을 이미 이 블로그에 상재했다. 아래가 그것이다.

 

나정蘿井은 왜 신궁神宮이며, 그곳은 왜 국모묘國母廟인가?

동시대 신라를 둘러싼 모든 문화권에 다 있기 때문이다. 중국에 (周 왕조 시조) 후직后稷 엄마 강원姜嫄을 제사하는 비궁閟宮이 있고 고구려에는 주몽 엄마 유화柳花를 제사하는 국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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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여 신궁 주신이 혁거세 엄마를 겨냥했다 해서 그렇다면 신궁이 혁거세랑은 관계가 없는가?

엄마는 아들로 귀하게 되는 법이다.

그런 점에서 신궁은 곧 혁게세 사당이다.

덧붙여 혁거세는 신라를 있게 한 뿌리라 신궁은 곧 종묘 중에서도 태두가 된다.

삼국사기 제사지에서 신라 종묘제도를 기술하면서 신궁을 든 이유가 이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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