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아 불교건축에서 탑과 금당은 핵심이요 석가모니 부처님 그 자체다.
생전에, 그리고 입멸시에, 그리고 사후에 그런 부처를 공양하듯이 탑과 금당은 부처 자체이므로 이를 건축하는 행위는 공양 그 자체다.
공양엔 공양물이 있기 마련이다.
심적이건 물적이건 공양물이 있다.
탑을 발굴하면 기단부 주위로 무수한 귀중품이 발견되는 일이 있는데 이것이 바로 부처님을 향한 공양품이다.
금당 혹은 대웅전도 그것을 지은 땐 공양품을 넣었다.
지진구 진단구 운운하는 소리는 본질을 호도한다.
(2014. 8.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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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 당시 이전엔 영국사라는 사찰이 있던 곳에 세운 서울 도봉구 도봉서원터를 발굴한 성과가 공개되었거니와 이를 염두에 둔 글이다.
당시 이 글을 두고 오간 말 중 의미 있다고 생각하는 지적들을 추린다. 다만 어투는 조금 손질했음을 밝힌다.
김정인 : 건물지 기단 주변에서 나오는 그릇들을 모두 진단구로 보는 견해는 저도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그걸 또 금당에 대한 공양물로 보는 것은 좀 더 확실한 근거가 있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공양이라는 의식에만 기대 바라보기에는 그런 그릇들의 매장 형태가 너무도 다양합니다.
김태식 : 금당이 부처님 집이요 당연히 금당을 세울 땐 공양을 해야하며 그게 어찌 지진구 진단구리오? 내가 얼마전 불교중앙박물관 조계사 특별전을 그리 보라고 추천했거니와 그거 보면 1930년대 조계사 대웅전 세울 때도 바리바리 공양품 싸가지고 와서 공납했으니, 묻거나 대웅전에 안치하고, 건물에도 올리고. 탑을 세울 때도 지금은 기단부 지하에만 남아있지만 원래는 탑 곳곳에 묻었죠.
김태형 : 공양품, 공양물....글쎄요. 확진은 금물입니다. 피치 못할 사정으로 절을 떠나게 되어 나중에 다시 찾고자 묻어둔것일 가능성이 더 커요.
김태식 : 아..그 가능성은 당근 있습니다. 이른바 퇴장退藏 예장瘞藏 유구입니다. 하지만 이 경우는 그럴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봅니다.
신지용 : 모 사찰 상량식 때 보살님들이 소지하고 있던 귀금속 빼서 상량대에 많이 넣으시던걸요. 공양 겸 후세가 이 건물을 보수할 시 도움이 되기를 기원하면서 넣었습니다.^^
김태식 : 바로 이거로 봅니다.
김태형 : 부석사 무량수전 들보에서는 일제 때 수리하면서 불상, 청동탑 등 수십 구가 나온 일이 있죠. 거의 모두 통일신라 불상들. 아마도 14세기 중엽 병화로 소실되면서 수습된 불상들을 무량수전 중건하면서 들보에 넣은 것으로 보이는데.....이 불상들 지금은 모두 행방불명. 일부가 서울 국박에 있다는데,,,거기서도 잘 모른다고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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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기사를 참고바란다.
2013.05.01 15:37:52
<'한국 불교의 중심' 조계사 대웅전 역사를 본다>
불교중앙박물관 '조계사 창건역사와 유물' 기획전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국내 최대 불교 종파인 대한불교 조계종 총본사는 서울 종로구 견지동 조계사. 25개 본사 중 하나이기도 한 조계사는 그 위상에 견주어 역사가 잘 알려져 있지는 않다.
조계종 산하 불교중앙박물관(관장 원학스님)이 2003년 조계사 대웅전 보수공사를 진행할 때 발견한 상량유물을 비롯한 관련자료를 통해 조계사의 창건 역사를 되돌아 보는 2013년 봄 기획전을 오는 10일 개막한다.
8월 11일까지 계속할 이번 전시에는 1938년 조계사 대웅전 건립 당시 한국 불교의 상황과 생활사를 보여주는 중요한 근대 자료 240점이 선보인다.
지금의 조계사는 1910년 각황사(覺皇寺)로 역사를 시작한다. 당시 사대문 안 최초의 사찰인 이곳은 1938년 대웅전을 건립했다. 이후 한국불교의 전통과 역사를 계승하는 의미에서 태고 보우(太古 普愚·1301-1382) 스님이 주석했던 절인 태고사로 이름을 바꿨다.
그러다가 1954년 불교정화운동을 통해 지금의 조계사(曹溪寺)라는 이름이 탄생했다.
이런 초창기 역사를 조명하기 위해 이 자리에는 한용운의 '조선불교의 개혁안'(1931), 태고사 설립 관련 기사 모음(1937.3-1938.11), 대웅전 건축 공사 사진 및 관련자료(1937), 태고사 재산대장(1940), 조계종 총본사 태고사법 사본(1941) 등이 선보인다.
이어 기획전은 대웅전 건립에 주도적인 역할을 한 인물을 소개한다. 이 사업을 총괄한 지암(智庵) 종욱(鍾郁) 스님과 실제 건축물을 세운 도편수 최원식(崔元植), 불화를 그린 화사 금용(金蓉) 일섭(日燮) 스님 등이 대상이다.
그런 다음 이번 전시는 그 하이라이트라 할 만한 대웅전 건립 관련 상량 관계 문서를 펼쳐보인다.
이런 자료로는 조선불교총본산대웅전상량문(朝鮮佛敎總本山大雄殿上樑文)과 총본산건설소역원(總本山建設所役員), 총본산건축비각사부담액(總本山建築費各寺負擔額), 관서질(官署秩)의 네 장이 발견됐다.
상량문은 당시 중앙불교전문학교 교수던 권상로(勸相老)가 썼다. 이에는 조선총독 미나미 지로(南次郞)가 외친 '심전개발(心田開發)을 기념하기 위해 총본산 대웅전을 지었노라고 적혀 있어 당시 시대상황과 총본산 건설과정의 서글픈 우여곡절을 짐작케 한다고 박물관은 설명했다.
각사부담액은 대웅전 건설에 참여한 31본산의 부담액을 적은 문서. 31본산에서 이건축비(옮겨 세우는 건축비용)로 총 10만402원47전을 모아 건축비용을 부담한 내용이 있다. 이는 현재 가치로 약 100억원 정도로 추산된다고 박물관은 덧붙였다.
건설소역원은 대웅전을 건설한 실무 담당자 명단을 적은 문서. 당시 설계 담당과 관리직은 모두 이왕직(李王職) 영선과 소속 일본인들이었으나 대웅전 건립은 사실상 모두 우리의 손으로 이루어졌다고 박물관은 강조했다.
대웅전 건립과 준공 당시 조계사 앞마당은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이들 가운데 간절한 소망과 진실한 마음의 원을 세워 부처의 자비와 원력을 받고자 개개인의 소중한 물건을 대웅전에 넣어두었다. 개인 이름이나 법명 또는 발원 내용을 간략히 적은 자료가 있는가 하면 이름이나 법명과 함께 건강·자손의 번창·복 등을 기원하는 발원을 적은 은판·뒤꽂이·귀이개 등도 있다.
이번 기획전에는 이런 자료들이 선보인다.
한편 불교중앙박물관은 문화재청에서 학술용역사업으로 진행하는 금석문조사사업을 최근 착수했다. 이를 위한 금석문 탁본사업은 올 연말까지 마무리할 예정이다. (본문 고딕 강조는 인용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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