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랑세기》에 의하면 중고기 신라왕실에서 왕비를 배출하는 양대 모계 혈통으로
1. 진골정통眞骨正統
2. 대원신통大元神統
두 가지가 있거니와,
진골정통은 그 뿌리가 지금의 경북 의성에 뿌리를 박은 조문국(혹은 소문국)이다.
그 왕실이 신라에 통합됨으로써, 그 왕녀가 배출하는 딸과 그 후손들이 왕비에 충당되곤 했다.
이 진골정통에 대비되어 눌지왕 무렵 이후에 또 다른 모계 혈통이 강력한 라이벌로 등장하니 그것이 곧 大元神統이다.
이 대원신통은 현존 《화랑세기》에서는 그 뿌리가 보미寶美라는 여성이라는 사실만 알 수 있을뿐, 그 보미는 혈통이 어찌되는지 확실치 않다.
원본에는 있었지만, 그것을 담았을 부분은 불행하게도 탈락하고 없다.
그렇다면 보미는 누구인가?
그 어미는 왜 왕실 왕녀다.
그렇다면 보미가 신라와 연결한 고리는 무엇인가?
미사흔未斯欣이다.
미사흔은 누구인가?
그 비밀의 열쇄는 그의 왜국 인질생활이다.
내가 일전에 미사흔이 무슨 죄수처럼 10년간이나 왜국에서 생활한 줄 아냐고 물었던 일, 기억할지 모르겠다.
뭐 미사흔은 수도생활하며 밤마다 허벅지 바늘 찔렀겠는가?
여자는 없었단 말인가?
신라 왕비를 배출한 양대 모계가 모두 뿌리가 외국이었다.
신라가 다문화 가정 선도한 왕조였나?
이 대목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거나 받아들일 자세가 있으면, 왜 임나일본부가 나왔는지 그 의문도 푼다.
도대체 임나일본부란 무엇인가?
왜 저리 일본측 기록에서는 임나일본부가 조선총독부처럼 남았는가?
그 비밀은 오직 《화랑세기》만이 푼다. (2017. 10. 27)
***
신라 왕실의 왕비 배출 혈통을 첫째 철저히 모계에서 구하고, 둘째 그 모계는 철저히 외부라는 사실은 19세기 이래 20세기 초중반에 걸쳐 인류학이 구축한 연구성과와 신통방통하게 맞아떨어진다.
그네들에 의하면 이른바 혼인은 족외혼族外婚이라 해서, 외부 세계에서 반드시 상대를 구했다.
우리가 흔히 신라사회를 논할 적에 근친혼 사회라 하니, 이 근친혼 사회가 족외혼과는 언뜻 배치하는 것으로 보이나, 이 점이 신라사회가 갖는 특질이라 본다.
근친혼과 족외혼이 공존하는 방식은 무엇인가?
그것이 바로 혈통의 분리다.
부계 혈통과 모계 혈통을 분리함으로써 실제는 극심한 근친혼임에도 그 계통을 부러 갈라서 족외혼을 고수하고자 했다.
족외혼을 위한 절대 조건은 그러한 혈통의 철저한 외부 수혈이다.
왜 신라가 조문국 혹은 倭 왕실에서 왕비를 보급하는 모습을 시종하고 일관해서 유지하고자 했는가?
그들이 신라 왕실 외부에서 존재하는 존재였던 까닭이다.
이 대원신통 진골정통을 둘러싼 문제는 인류학 방면의 좀 더 성대한 성찰을 요구한다.
이종욱 선생에 이와 관련한 주목할 만한 성과를 내기는 했지만, 내가 말한 이와 같은 대목들을 제대로 짚진 못했다.
***
나중에 서강대 총장까지 역임한 이종욱 선생은 맹렬한 화랑세기 신빙론자이거니와, 그 자신이 또한 맹렬한 인류학도이기도 해서, 이 화랑세기 문제와 관련해서는 공사석 가리지 아니하고서 매양 하는 말이 "인류학을 조금만 알면 이런 걸 꾸며낼 수 없다는 안다"는 말로 분통을 터뜨리곤 했다.
그때마다 매양 나는 "그거 인류학 아니라도 얼마든 증명 가능해요. 바보 등신이 아니라면 말이죠"라고 받아치고선 낄낄 웃곤 했다.
***
정리한다.
신라는 철저한 근친혼?
이는 액면이다.
신라는 처절한 족외혼 사회였다.
근친혼으로 극심히 얽혔지만 이를 타개코자 모계혈통을 분리했으며 이 모계혈통은 반드시 신라밖에서 뿌리를 구했으니 그것이 바로
1. 조문국
2. 倭 왕실
이었다.
바로 이것이 임나일본부를 주장하는 거대한 뿌리다.
임나일본부가 무엇인가?
그 모든 비밀이 썩은 시체 매달린 구데기마냥 덕지덕지 화랑세기에 우글우글한다.
덧붙여 왜 신라가 통합한 주변국 가운데 유독 조문국이 대서특필되는가 그 의문도 오직 화랑세기를 통해 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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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식으로 접근하는 역사, 인질 미사흔의 왜국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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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세계에서도 족내혼은 금기했다.
한반도 역대 왕조 역시 그러해서 족외혼이 법칙이었다는 흔적은 너무나 많다.
당장 고구려에서는 왕비를 배출하는 부족이 따로 있었다 하며, 백제 역시 마찬가지라, 해씨解氏를 필두로 하는 왕비 배출 집안이 있었다.
고려 역시 마찬가지였으니, 유의할 점은 극심한 근친혼이긴 했지만, 그런 근친혼에서도 모름지기 모계 혈통이 달랐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조선왕조 이래 자리잡기 시작했다가 근래까지 극성한 동성동본 혼인 금지는 실은 족내혼 금지이며, 그것은 곧 족외혼의 법제화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신라는 그러한 흔적이 없는 거의 유일한 왕조였다.
하지만 유의할 점은 그런 흔적이 간취되지 않는다는 점이 그렇지 않았다는 것과 동일하지 않다는 데 있다.
바로 이런 의문을 화랑세기가 등장함으로써 일거에 해결하게 됐다.
신라는 대원신통과 진골정통이라 해서 철저히 모계에 기반하는 왕비 배출 계통을 설정함으로써,
족내혼을 금지하고 족외혼을 해야 한다는 그런 법칙을 고수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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