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는 지진의 상대적인 안전지대일 뿐, 그렇다 해서 근자 포항과 경주를 덮친 진도 6을 넘는 강진이 역사상 드물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없는 것도 아니었으니, 기록으로 남은 흔적을 볼 적에 신라시대 혜공왕 무렵과 고려 현종시대에는 특히 강진이 빈발했다.
저 무렵 지진 크기가 어느 정도인지 알 수는 없지만, 그 멀쩡하게만 보이는 석가탑과 다보탑이 붕괴한 것으로 보아 진도 7 정도였을 것으로 보아 대과가 없으리라 본다. 진도 6대를 기록한 포항 경주 지진에 두 탑은 멀쩡했으므로 그 정도로 보아도 될 성 싶다.
이번 터키 동부 일대를 강타한 진도 7.8 대지진을 보면 사망자만 해도 기하급수로 늘어나 수만 명을 헤아리는 것으로 집계되는데, 물론 시대와 공간을 달리하는 사정을 고려해야겠지만, 그럼에도 같은 강진인데 사상사 숫자에서 전근대 동아시아와 현대 사회는 뚜렷한 차이를 보이는 점을 지적할 수 있으니
생각보다 동아시아 전근대는 대지진에 따른 사상자 숫자는 현격하게 적다. 인구 규모, 특히 인구 밀집도를 우선 고려해야겠지만, 이것도 석연찮은 게, 혜공왕 시대 신라수도 경주는 정확한 통계는 없지만 인구 백만을 헤아린 대도시였다는 지적도 있고, 그것이 아니라 해도 50만 명은 되었을 것으로 보아야 할 성 싶다.
그런 대도시가 대지진이 덮쳤는데도, 그에 따른 사망자 숫자는 100명 정도 선이 최고였으니, 삼국사기 신라 혜공왕본기를 보건대
15년(서기 779) 봄 3월, 서울에 지진이 나서, 민가가 무너지고 사망자가 백여 명이 되었다. 태백太白(금성)이 달에 들어갔다. 백좌법회百座法會를 열었다.(백좌법회는 이런 천재지변의 소멸을 기원했을 것이다)
十五年春三月, 京都地震壞民屋, 死者百餘人, 太白入月, 設百座法會
라 한 대목이 지진에 따른 피해 양상을 기록한 거의 유일한 기록이 아닌가 한다. 혹 내가 놓친 게 있는가 하지만, 생각보다 사망자 숫자가 훨씬 적다. 대지진이 엄습한 고려 현종시대만 해도 인명 피해기록이 없다. 누락일까?
그 가능성은 상대적으로 낮게 본다. 인명 피해가 거의 없거나 있어도 적을 정도로 이채롭지는 않았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상상해 본다.
일전에 나는 저 혜공왕 시대 지진 피해 기록을 보면서 건물 붕괴에 따른 압사일 가능성은 상대적으로 적다고 보면서, 전통시대 건축물은 폭삭 붕괴하는 일은 생각보다는 드물다.
그보다는 기와더미에 맞아 죽거나, 혹은 움집 붕괴에 따른 사상자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는 막연한 상상을 한 적이 있다.
천재지변, 특히 지진의 시대 신라 혜공왕 시절
京都地震壞民屋, 死者百餘人...이 구절 "서울에 지진이 나서, 민가가 무너지고 사망자가 백여 명이 되었다"는 번역은 정문연본 삼국사기 역본을 옮김한 것인데, 대세엔 지장이 없으나, 서울에서 땅이 흔들려 민가를 붕괴케 하니 죽은 이가 백여 명이었다는 정도로 풀 수도 있다.
이 구절을 보면 대규모 사망자가 발생한 원인을 가옥 붕괴로 적었다. 더 중요한 것은 붕괴된 가옥이 민옥民屋이라는 점이다. 이 경우 民은 왕실이나 사찰 혹은 권력자 기와집은 아니다. 일반 백성 집이 집중 피해를 봤다는 뜻이다.
그 피해 양상을 좀 더 분명하게 파악하기 위해서는 당시 민옥民屋 구조를 알아야 한다. 하지만 이를 짐작할 만한 흔적이 좀처럼 없다.
그에 대한 기록도 거의 없는 데다, 이를 해명할 거의 유일한 현대 학문인 고고학이 뻘짓만 일삼는 까닭이라. 민옥에 대해선 관심조차 두지 않는다.
나아가 고고학 환상도 문제인데, 이 친구들은 근간이 절대적인 유물주의 신봉자라, 사라지고 없는 것은 생토층으로 처리하는 고질이 있어, 홍수로 쓸려간 자리를 생토라 착각하고, 흔적이 없다는 이유로 그에는 사람이 산 흔적이 없다는 결론을 도출하곤 한다.
민옥? 민옥이 무슨 흔적이 남는단 말인가? 그 대부분 붕괴 훼멸과 더불어 재건축의 경우 흔적도 없어지는 일이 허다하며, 나아가 홍수에는 쥐약이라 그 희미한 흔적조차 다 사라지고 만다.
내가 생각하는 고고학은 남은 흔적으로 그 시대 삶을 추적하는 것이 아니라, 이 사라진 이면들을 탐구하는 학문이어야 한다.
그렇다면 혜공왕 시대 민옥은 어떠했을까? 볼짝없다. 초가지 뭐겠는가? 움집도 더러 있었을 터지만, 절대 다수는 새마을운동 전까지만 해도 우리한테 흔한 초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이 초가야말로 저와 같은 대지진에 더 취약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왕궁이나 사찰, 혹은 김유신 종가 같은 권문세가 집들에서는 제아무리 대지진이 난들 그에 따른 건물 직접 붕괴가 일어날 일은 거의 없다고 본다. 왜? 목구조 기와집이 대지진에 폭삭 붕괴하는 일은 없다. 잘 짠 목구조가 그렇다.
다만 이런 고래등 같은 목구조 기와집에서도 조심할 점이 있는데 바로 지진에 따른 기왓장 낙하다. 그 대지진에 죽었다는 사망자 100명 상당수가 나는 기왓장 맞고 죽은 사람으로 본다.
초가? 초가 역시 상대적 안전성이 덜하기는 하지만, 이 초가 역시 생각보다 폭삭 주저 앉는 일은 매우 드물다. 초가가 폭삭 주저앉는 경우는 흰개미 피해 정도밖에 없다. 초가에 기와를 얹었을 수도 있지만, 초가에서 뭐가 떨어져 사람이 죽을 가능성은 매우 적다.
건물 붕괴에 따른 직접 압사는 매우 드물었다고 판단하며, 대신 대지진에 따른 산사태 가능성은 염두에 둬야 한다. 당시 민가는 대부분 구릉이라, 이 가능성도 높다고 나는 본다. 또한 지난 얘기에서 다뤘지만 움집 또한 직접 희생을 부는 원인일 수도 있을 것이다.
전통시대 동아시아 대지진이 희생자 규모가 훨씬 적다 해서, 그 원인으로 지목한 목구조 한옥으로 저 막대한 피해가 발생한 튀르키예 지구를 도새재생할 수는 없다.
내진설계라는 말을 많이 하는데, 글쎄다, 저 정도 강진에 내진설계가 아무리 잘된 건물이라한들, 버텨낼 재간이 있을까 싶다. 무엇보다 그 기반시설이 작살나는 마당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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