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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이모저모

제갈량諸葛亮, 충신보다는 냉혹한 법가法家

by taeshik.kim 2023. 2.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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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3.29 06:39:14
<육성으로 만나는 제갈량>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후한 왕조가 위魏·촉蜀·오吳의 삼국으로 분열되어 천하제패를 위해 쟁투하던 시대의 한복판을 살다간 제갈량諸葛亮(181~234)은 언제나 충신으로 빛을 발했다.

적벽부赤壁賦가 음주학(飮酒學)의 고전이라면, 그의 출사표出師表는 동아시아 '보스학'(boss學)의 원천이었다. 누구나 임금을 향한 충(忠)을 논할 때면 출사표를 들었다.

"신(臣)은 본래 남양(南陽)에서 밭이나 갈던 농민으로서 난세에 그럭저럭 목숨이나 부지하려 했을 뿐 제후에게 빌붙어 현달하고자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뜻밖에도 선제先帝께서 신의 비천함을 꺼리지 않으시고 몸소 지체를 낮추시고 세 번이나 신의 초가집에 왕림하시어 오늘의 천하대사天下大事를 물으셨습니다."

저 유명한 삼고초려三顧草廬가 출현하는 장면이다.



오장원五丈原이란 전쟁터에서 당시 황제 유선劉禪에게 올린 출사표에서 제갈량이 이렇게 말하자, 이후 모든 힘 있는 자들은 훌륭한 인재를 얻기 위해 삼고초려라는 내키지 않는 의식을 되풀이해야 했다.

그렇다면 왜 이토록이나 제갈량은 유비劉備-유선劉禪 부자에게 눈물겨운 충성을 맹세했을까?

서기 223년, 백제성이란 곳에서 촉한 초대 황제 유비는 죽음을 앞두고 어린 아들 유선을 제갈량에게 부탁하면서 이런 말을 한다.
"유선이 정 부족하다고 생각하거든, 그대가 제위(帝位)를 이어라."
세상 어떤 군주가 죽으면서 신하에게 정 아니되겠거든 찬탈해도 좋다는 유조遺詔를 내린단 말인가. 나아가 이런 군주에게 충성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제갈량은 세계 전사를 대표하는 병법가이기도 했다. 남송시대를 대표하는 학자 왕응린王應麟은 옥해玉海라는 책의 '병법'(兵法)이란 항목에서 제갈량의 전쟁론을 발췌해 수록했다. 여기서 제갈량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아껴야 할 바와 버릴 바를 알게 되면 전투를 지휘할 수 있다. 훌륭한 장수는 자기 군대의 버릴 것으로서 자기 군대의 아껴야 할 것을 보호해야 한다… 나에게 가장 모자라는 능력이 남이 가장 뛰어난 능력과 비겨서 따를 수 없을 것인데, 나는 이미 그것을 알고 있는 이상 그것을 버린다."

북송시대에 편찬된 백과전서 태평어람太平御覽에는 "위엄이 있으면서도 교만하지 않고 위임을 받고서도 독단하지 않으며, 도움을 받으면서도 의지하지 않고, 파면됨을 두려워하지 않아야 장수의 행동에 백벽(白壁. 흰구슬)과도 같이 오점이 없을 수 있다"는 제갈량의 말을 수록하고 있다.

충신이라는 이미지 때문에 제갈량은 유교적 윤리에 충실했을 듯하지만, 그보다는 냉혹한 병법가나 법가(法家)적 성향이 짙은 인물이다.

읍참마속泣斬馬謖이라는 말은 그의 이런 면모를 여실히 드러내지만, "지금 천하가 분열되어 있고 북벌이 방금 시작되었는데 만약 법과 규율을 폐지한다면 무엇으로 적을 토벌하겠는가"라는 주장은 한비자韓非子나 상앙을 떠올리게 한다.
중국 옌볜대학 어문학부 출신으로 그곳 언론인인 조희천 씨가 옮긴 '와룡의 눈으로 세상을 읽다'(신원문화사)는 장주張澍의 '제갈량문집'의 완역본이다.

제갈량이 죽은지 40년 뒤, 정사 삼국지(三國志)의 저자이기도 한 진수(陳壽)는 제갈량이 남긴 글을 모아 24편 10만4천12자 분량인 '제갈량문집'을 만들었다.

하지만 이 제갈량문집은 이미 오래 전에 망실되고 없다. 현전하는 제갈량문집은 청나라 때 장주가 이곳저곳에 흩어져 전하는 제갈량의 말들을 편집한 것이다.

비록 제갈량 저작임이 의심되는 글, 나아가 그의 작품이 아닌 것이 확실한 글도 들어가 있기는 하나, 현재 구할 수 있는 그의 직접 육성은 거의 모두 모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536쪽. 1만9천원.
taeshik@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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