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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호철의 잡동산이雜同散異

신숙주가 무장읍성 아관정迓觀亭에서 읊은 시

by taeshik.kim 2021. 10.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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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공장 문화부 기사 박상현이 찍은 거란다. 야마 돌았나? 사진 하나 변변한 게 없어서? 


신숙주申叔舟(1417~1475)의 《보한재집保閑齋集》에 수록되지 않은 시가 《신증동국여지승람》 권36 〈무장현 제영〉에 전한다. 제목은 따로 전하지 않는다. 여기 성은 무장읍성을 이르고 성 위 정자는 객관 북쪽에 있었던 아관정迓觀亭을 이르는 듯하다.


"외로운 성 위 정자에서 두어 날을 머무는데 信宿孤城城上亭
가을바람 꿈결 혼마저 처량하게 불어오누나 西風吹入夢魂清
나부끼는 남은 오동잎 읊노라니 늙어만 가고 桐飄殘葉吟中老
늘어지게 새로 핀 국화꽃 유달리 환하구나 菊嚲新花分外明
땅끝 바닷가 하늘은 고원한 마음 일으키는데 地盡海天生遠意
깊어가는 가을 북과 나팔 소리 변방을 울리네 秋深鼓角作邊聲
고아한 시에 화답하려 하나 좋은 글귀 없으니 欲賡高韻無佳句
감히 시인의 이름이나 기억해 달라 말하겠소 敢道爲詩記姓名"


라고 하였다.

정곤鄭坤이 지은 아관정 기문은 다음과 같다.


"이 고을은 전라도 서쪽 큰 바닷가에 있는데, 고려 말기에 왜구倭寇가 한창 설치어 백성이 생업을 잃고 정처 없이 떠돌며 피난 다니느라 쓸쓸히 텅 빈 지가 오래였다. 지금 우리 성조盛朝에서 옛 성인聖人을 계승하시어 안으로 정치와 교화를 닦고 외적을 방어하여 천하가 태평하니, 바닷가 고을 백성의 재물이 넉넉해졌다. 이에 무송현茂松縣과 장사현長沙縣을 합해서 한 고을로 하고 여기에 진鎭을 설치하여 어질고 재능있는 사람을 뽑아 주장主將을 삼아 변경을 굳건히 하였다. 이어 두 현 중간 좋은 터에 성을 쌓아 백성을 살게 하고, 창고, 관사官舍와 군영軍營까지도 모두 두었다. 지금 절제사節制使 송유인宋有仁 공은 온화한 군자다. 기유년(1429년 세종11) 봄에, 대호군大護軍으로 있다가 명을 받들어 이 진에 절제사로 왔는데, 군정軍政은 흥기興起하였고 민사民事는 다스려졌으며, 농사도 풍년이 들었다. 이에 더운 날 손님을 맞을 곳이 없고, 무예를 시험할 때 활쏘기를 할 만한 곳이 없음을 생각하여, 마침내 객사 북쪽 높은 언덕 위에 정자를 하나 지었는데, 규모가 굉장하여 손님을 맞이하기도 하고 혹은 활쏘기를 익히기도 한다. 그래서 ‘손님을 맞는다[迓賓]’에서 ‘아迓’ 자를 취하고 ‘활쏘기로 덕행을 본다[觀德]’에서 ‘관觀’ 자를 취하여 ‘아관迓觀’이라고 이름 지었다.……”

 

*** (태식補) ***

 

무장읍성, 그 토대가 된 무장茂長이라는 고장은 조선초기 무송현茂松縣과 장사현長沙縣 두 고을을 합해서 한 글자씩 따서 탄생한다. 문제는 이런 통합에 따른 산적한 현안이 한둘이 아니었다는 것이니, 그 실상을 우리는 잘 알 수가 없다는 점이다. 

이 경우 동서고금 막론하고 통합 행정도시 관청을 어디다 두느냐 박터지는 싸움이 벌어질 수밖에 없으니 고려말~조선초기를 살다간 정곤鄭坤이라는 사람이 그 편린을 남겼으니, 이때 또 동서고금 가장 좋은 방식이 두 행정구역 접점에다가 설치하는 것이다. 이것이 논란을 그나마 줄인다. 

이 전통이 지금도 이어지거니와 ktx역을 봐도 김천에 구미가 꼽싸리 붙어 탄생한 김천구미역, 천안 아산 박터지게 싸우다 탄생한 천안아산역이 그런 경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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