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록과 승정원일기]
《영조실록》 34년(1758) 5월 4일 기사에
임금이 말하기를
"종묘(宗廟) 앞에 놓아 둔 돌은 바로 일영대(日影臺)인데, 경 등은 이를 아는가?"
하니, 모두 말하기를
"알지 못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열성조(列聖朝)에서 미행(微行)할 때에 한 늙은 할멈을 만났는데, 그가 남편에게 이르기를, ‘세성(歲星)이 적성(賊星)에게 쫓긴 바가 되어 유성(柳星) 아래로 들어갔다.’고 하는 것을 보고는, 그때에 바로 그 할멈을 운관(雲觀)에 예속하게 하였는데, 일영대는 이 할멈을 위해 설치한 것이다."
하였다.
[上曰: "宗廟前置石, 乃日影臺, 卿等知之乎?" 僉曰: "不知。" 上曰: "列聖朝微行時遇一老嫗, 則謂其夫曰, ‘歲星爲賊星所逐, 入柳星下’, 其時卽使其嫗隷於雲觀, 日影臺爲此嫗設矣。"]
라고 되어 있다.
일영대를 노파를 위해 설치했다는 것이 야릇하여 이날 승정원일기 기사를 찾아보니 다음과 같다.
임금께서 말하기를, “경복궁 간의대(簡儀臺)에 남겨진 돌을 사람들이 모두 놋쇠벼루[鍮硯]라고 하는데 실은 잘못 알려졌다. 종묘 앞에 둔 바위와 일영대(日影臺)를 경들은 아는가?”
라고 하니, 모두가
“알지 못합니다.”
라고 하였다. 임금께서 말하기를
“열성조에서 미행할 때 한 할멈을 만났는데, 그녀가 남편에게 말하기를, ‘세성(歲星)이 천성(賤星)에게 내쫓겨 유성(柳星) 아래로 들어갔다.’고 하는 것이었다. 당시에 곧바로 그 할멈을 서운관(書雲觀)에 예속시키고 일영대 옆에 기대는 돌[欹石]은 이 할멈을 위해 설치한 것이었다.”
라고 하였다.
[上曰:“慶福宮[景福宮]簡儀臺遺石, 人皆謂之鍮硯, 實非矣。宗廟前置石及日影臺, 卿等知之乎?” 僉曰:“不知矣。” 上曰:“列聖朝微行時, 遇一老嫗, 則謂其夫曰:‘歲星爲賤星所逐, 入柳星下。’ 其時卽使其嫗, 隷於雲觀, 日影臺傍欹石, 爲此嫗設矣。”
승정원일기 홈페이지 텍스트에 마지막 ‘爲此嫗設矣’가 ‘爲此嫗設耳’로 쓰였는데 이는 잘못이다.]
여기에서 실록의 ‘宗廟前置石, 乃日影臺’가 승정원일기에는 ‘宗廟前置石及日影臺’로 쓰였고 ‘日影臺爲此嫗設矣。’이 ‘日影臺傍欹石, 爲此嫗設矣。’로 되어 있어서 일영대와 의석(欹石)이 구분되어 있다.
이는 실록의 기사보다 승정원일기의 기사가 더 정확한 것이다. 사초나 승정원일기 등을 바탕으로 시정기를 만들어 실록을 편찬하는 과정에서 문장을 간결하게 다듬다가 이런 실수가 잦다.
그러나 저러나 종묘 앞에 저 돌이 있던가? 진짜 할멈을 서운관에 예속시켜 썼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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