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주四柱 보는 자들이 이런 말을 한다.
"태어난 해보다는 태어난 달이 중요하고, 태어난 달보다는 태어난 날이 중요하며, 태어난 날보다는 태어난 시각이 중요하다. 태어난 시각보다 중요한 것이 문벌이다."
이는 오로지 우리나라 사람에게만 해당하는 사항이다. 문벌이라는 법은 애초에 거친 오랑캐의 천한 습속에 불과했는데, 그것이 풍속을 변화시키고 귀천을 나누다가 급기야 운명과 맞서기도 하고 운명을 누르기도 한다. 비록 사주라 할지라도 우리나라의 이른바 문벌에 대해서는 어떻게 할 수 없다. ( 유만주 지음 김하라 편역 《일기를 쓰다2 흠영선집》 돌베게, 2015.7, 24쪽)
조선후기 영·정조 시대 서울을 무대로 살다간 사대부 유만주兪晩柱(1755~1788)가 21살 때인 1775년 설날에서 시작해 죽기 한 달 전인 1787년 12월까지 죽죽 써내려가고는 그에다가 《흠영欽英》이라는 제목을 스스로 단 일기 중 1777년(정조 원년) 8월 3일자에다 적어 놓은 말이다.
문벌이 주는 혹독함과 그것으로 개인 운명을 결정하는 조선사회 시스템을 비판하는 것처럼 들리지만, 주의할 것은 조선시대 저런 말 한 사람이 천지이며, 그럼에도 저 시스템은 결코 변화를 준 적이 없다는 점이다. 다 입으로만 나불댄데 불과하며, 그 점에서 유만주 역시 하등 예외가 될 수 없다.
덧붙여 사주를 보는 사람 입을 빌려 저런 말을 하면서 그에 대한 논평 역시 오류투성이다.
문벌로 모든 것이 결정되는 시스템은 인류가 지구상 출현한 이래 만고의 진리다. 비단 조선이라 해서 그런 것만도 아니요, 더구나 그것이 오랑캐 습속이라니 이 무슨 망발이란 말인가?
금수저 물고 태어나야 한다. 간단히 말해 아버지 잘 만나야 한다는 사실이다.
문제는 아버지가 날 선택하지 내가 아버지를 선택할 수 없다는 점이다.
하긴 요새 자식들이 저런 식으로 하도 아버지 괴롭히니, 영화든가 드라마든가 그에서 아버지가 이리 받아치더라.
"야이 자식아, 나도 너 같은 자식 선택한 적 없어!"
부모의 반격이다. 공격이 매서울 수록 저항 또한 거센 법이다.
'역사문화 이모저모 ' 카테고리의 다른 글
무령왕은 두 번 죽어야 했다 (2) | 2020.04.11 |
---|---|
와우아파트 붕괴, 반세기 전의 육지판 세월호 참사 (1) | 2020.04.11 |
경주 서악고분 만데이서 관음觀音을 공양하며 (0) | 2020.04.06 |
보카치오가 《데카메론》에서 증언하는 흑사병(5) 끝 (1) | 2020.03.31 |
보카치오가 《데카메론》에서 증언하는 흑사병(4) (3) | 2020.03.30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