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귀화인 쌍기 건의로 고려 광종 시대에 과거제가 개막할 때만 해도, 그것을 승인 추진한 광종과 그 실무를 밀어부친 쌍기조차도 이후 고려사회가 어찌 변할지 몰랐다.
그만큼 이 조치는 단군조선 이래 볼 수 없던 혁명이었다.
이른바 호족이라 일컬은 권문세가 자신들과 그 음덕으로 출사한 그 후손들이 관료들이 지배하던 사회가 급속도로 행정고시로 무장한 관료제 사회로 변화해갔기 때문이다.
이런 성공 신화 이면에는 그것이 배출한 사람들이 한결같이 영웅으로 추앙되기 시작한 시대 분위기도 무시할 수 없다.
그랬다. 구국영웅 서희는 비록 아버지 음덕이 크긴 했겠지만, 그는 황금방 출신으로 일찍 출사해 고속승진을 거듭하다 제1차 고려거란전쟁에서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성과를 냈고
강감찬은 비록 출사는 늦은 편인 것으로 보이나, 오래 살아서 생전에 영웅대접을 받았고, 그를 보좌한 같은 진주강씨 강민첨 또한 예외가 아니어서 강감찬 못지 않은 영웅 대접을 받았다.
조금 시대가 뒤져 김부식 시대가 오면 이제는 그 급제자 모두가 저들 황금방 출신자들이 세운 사설학원을 수학한 자들로 관료사회가 완전히 장악됐으니,
이 사설학원 쪽집게 강사 시대를 연 주인공이 다름 아닌 제1차 고려 과거시험 수석 최섬이었다. 최섬은 김심언이라는 걸출한 제자를 배출하면서 그 자신도 역사에 이름을 남겼다.
최섬이 역사의 무대에 사라질 무렵, 이제 그 후배들이 아예 개경 곳곳에다가 사설학원을 설립해 쪽집게 강사 시대를 본격으로 열게 되었으니, 그 대표가 최충이었다.
고려사 권74 지志 권 제28 선거選擧2 학교學校 사학私學은 아예 편명 자체가 사설학원 쪽집게 강사 열전이라 최충이 사설학원을 연 문종文宗 시대 사설학원 난립시대를 증명하거니와
이때 이미 나이가 많이 퇴사하거나, 실권은 없는 한직 비스무리한 노익장 최충은 대규모 사설학원을 건립해 성업 중이었으니, 견주건대 이는 내 시대 사설학원 종로학원이나 대성학원에 해당한다.
이 무렵 그를 태사大師·중서령中書令이라 부르지만, 내가 볼 땐 이때 최충은 저 자리 있었다기 보다는 그 전직을 말했을 뿐이요, 퇴사했거니와 그에 버금하는 꿔다논 보릿자루 전직 관료였다.
그 자신 황금방 출신이기에 학생 모집에는 더 없이 유리했으니, 쪽집게 강사가 합격을 보장한다는 찌라시를 만들어 뿌렸던 것이니,
그의 명성에 기대어 그의 사설학원은 성업을 구가했다.
같은 사학 코너에서 이르기를 푸른 깃옷을 입은 생도들[靑衿]과 흰옷을 입은 민(民)들[白布]이 그 집의 문과 거리를 가득 메우고 넘치게 되었다 하거니와
학생이 몰리는 바람에 한 곳에다 수용하지 못해 9재齋로 나누었다 했으니, 이건 볼짝없이 분반을 한 것이라, 그 이름이 남았으니
낙성재樂聖齋·대중재大中齋·성명재誠明齋·경업재敬業齋·조도재造道齋·솔성재率性齋·진덕재進德齋·대화재大和齋·대빙재待聘齋라 열거한다.
중용 냄새가 물씬한 이름이라는 점이 이채롭거니와 이를 당시 사람들이 ‘시중최공도侍中崔公徒’라 했다 하니 쪽집게 최시중 사설학원이라는 뚯이다.
그렇다면 이 학교를 통해 그 학생들이나 학부모를 무엇을 기원하였던가? 이것이 가장 중차대하다.
같은 지에 이르기를 "의관자제衣冠子弟들로서 무릇 과거科擧에 응시하려는 자들은 반드시 먼저 이 도徒에 들어가 배웠다. 해마다 여름철에는 승방僧房을 빌려 하과夏課를 열었는데, 도徒 출신으로 급제하여 학문이 우수하고 재능이 많지만 아직 관직에 나가지 못한 사람을 택하여 교도敎導로 삼았다."고 했다는 대목이 그것을 웅변한다.
여름 특설강좌까지 연 것이다.
이 학교 졸업자들을 문헌공도文憲公徒라 불렀으니, 이는 요새 한국사회에서도 흔하디 흔한 바로 그 동창회였다.
그랬다. 저들이 원한 것은 오로지 입신양명과 그것을 위한 과거 합격 딱 그것이었다. 이 수요를 읽고서 정확히 최충은 교육사업에 나섰던 것이며, 그것으로써 대히트를 친 것이다.
교육사업으로 떼돈을 번 역사상 인물로 1, 공자 2. 최충 두 명을 꼽을 수 있거니와, 조선시대로 넘어와서는 퇴계가 이 사업으로 대성공을 거둔다. 퇴계 역시 사립학교 도산서원 창립자 겸 이사장이었다.
또 하나 유의할 것은 최섬을 필두로 최충에 이르기까지 저들이 실상은 투잡을 뛰었다는 사실이다.
고려시대는 퇴직했다 해도 현직으로 취급받아 현직 때 녹봉 절반을 받는 정식 공무원이었다. 이 문제는 뒤에서 지적한다.
퇴직한 듯 아니한 듯한 저들 관료들이 사설학원을 잇따라 열었으니, 한국사회에 이 정도로 사립학교가 번성하기는 조선 중기 이래 서원 시대 이전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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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제가 사설 학원시대를 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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