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는 왕건 이래 사관을 두었으며, 각 왕대별로 실록을 편찬했다. 즉, 새로운 왕이 즉위하면 곧바로 전대 왕 실록 찬수에 착수해 왕대별 실록을 찬진해 나갔다.
하지만 고려사나 고려사절요를 통독하다 보면, 왕건 이래 제7대 목종穆宗(재위 997~1009)까지 기록은 빈한하기 짝이 없어 뜯어먹다 버린 다랑어 같다.
이리 된 까닭은 제2차 고려거란전쟁에 개경이 함락당하면서 궁궐이 불타버리고 전대 실록 역시 모조리 소실된 까닭이라,
그런 흔적이 너무나 뚜렷해서 목종 이전과 목종 이후 고려사는 질과 양 모두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전기가 빈약하기 짝이 없다.
목종시대까지 실록을 흔히 7대실록이라 이름하니, 고유명사가 아니라 그 전 시대 통사를 통칭하는 것이다.
실록을 편찬하려면 그를 위한 임시기구라 출범하는데, 총찬관 혹은 총수관이라는 이름의 감독자를 두거니와 보통 재상급 혹은 퇴임한 재상 중에서도 문사가 뛰어난 노땅을 선발하고, 그 밑에 각 분야 전문가를 두어 기록을 정리한다.
이를 위해 무엇보다 이곳저곳 흩어진 사초들을 모으게 되는데, 실록 편찬과 더불어 그 사초 역시 중요한 것들은 따로 보관하기는 하지만, 일단 실록이 편찬된 이상, 시간이 흐르면서 사초들은 망실되기 마련이다.
이는 요즘의 눈문 혹은 책 쓰기와 매우 흡사해서, 그것을 쓰는 과정에서 모은 자료들은 보통 논문 발간 혹은 단행본 발간과 더불어 보통은 쓰레기통으로 가는 일과 같다.
그러니 7대실록 혹은 그 사초까지 모조리 불탄 가운데서 이제 새로 7대 실록을 쓰야 했다. 그 임무를 맡은 이가 바로 황주량黃周亮(?~?)이었다.
물론 그 개인이 이런 엄청난 일을 할 수는 없고, 당연히 조정 명령을 받고 이 힘겨운 일을 해 냈으니, 지금 보는 고려사 및 고려사절요 목종 이전 7대 실록은 황주량 간난의 투쟁 결과다.
고려사 그의 열전에서 말하는
이전에 거란 군사들이 개경을 함락하고 궁궐에 불을 지르니 서적이 모두 타서 잿더미가 되었다. 황주량은 조서를 받들어 〈사적을〉 찾아내고 가려서, 태조로부터 목종에 이르는 7대 사적事跡을 찬집하여 모두 36권을 바쳤다.
고 한 대목이 바로 그것이다.
이에서 보듯이 7대 실록은 사찬이 아니라 관찬이었다.
결정판이 망실된 가운데서, 그나마 남은 자료들을 박박 긁어모아 이런 일을 이만큼이나 해 놨으니 그 눈물겨운 투쟁에 우리는 찬사를 보내야 한다.
이 황주량 실록이 조선초 고려사와 절요 편찬 때까지 남아있었음이 확실한데, 고려사 편찬 범례에 이르기를
고려는 세계世系가 잡기雜記에 나타나는 것은 대개 다 황탄荒誕하므로 이제 황주량黃周亮이 편찬한 실록實錄의 삼대추증三代追贈으로서 정설을 삼고 잡기에 전하는 바를 덧붙여 기록해 따로 세계를 짓는다.
고 한 것이 그 증거다.
#황주량 #칠대실록 #7대실록 #고려거란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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