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사나 고려사절요를 읽다 보면 저 표현이 자주 등장하는데, 저 문제의 심각성을 어떤 역사학도도 지적한 일을 못 봤다.
저 구정이란 구毬하는 마당, 혹은 구장[庭]이라는 뜻으로 이 경우 毬란 바로 격국擊鞠 혹은 타구打毬 혹은 격구擊毬라 일컫는 스포츠로 폴로 경기를 말한다.
말타고 막대기로 공을 쳐서 골을 넣는 경기라, 이 스포츠가 고려시대에는 특히 성행한 것으로 보아, 신라시대에는 그랬다는 기록이 없어서 그렇지, 동시대 당나라에서는 현종 이륭기가 광팬으로 이 스포츠를 직접 혹닉한 것으로 보아 신라에도 도래해 성행했음에 틀림없다.
물론 구정毬庭이 꼭 격구 폴로만을 말하는 것인가 하는 데는 의문 혹은 반론이 없지는 아니해서 축구蹴毬 또한 약칭해서 구毬라 하니, 이 경우 축국은 현대 스포츠 축구의 그것과 매우 흡사한 운동이다.
현대에 와서는 蹴球라는 말을 즐겨쓰기는 하지만, 본래는 蹴毬 혹은 축국蹴鞠이었으니 이 스포츠는 한반도의 경우 이미 신라 중고기에 성행했다.
김유신과 김춘추가 한 판 붙은 스포츠가 바로 축국이었다.
암튼 구정毬庭이란 곧 축구장을 말하는데, 고려시대에는 개경 만월대 궁전에 따로 이런 축구장이 있었다.
이 만월대 정문에 해당하는 곳, 곧 경복궁으로 치자면 광화문 앞마당 같은 데가 위봉루威鳳樓라는 데라, 그 근처에 초대형 축구장이 있었다.
기타 구정이 등장하는 맥락을 보면 스포츠광인 의종 같은 경우는 아예 구정을 궁궐 안쪽에 들이민 흔적도 보인다.
이 구정이 왜 중요한가?
이곳을 무대로 카니발, 군주와 백성이 직접 만나는 대중정치가 이뤄진 까닭이다.
당장 태조 왕건만 해도 구정 혹은 위봉루 앞마당에서 각종 위락잔치를 대대적으로 열었으니 팔관회 같은 행사를 이곳에서 개최했고, 무엇보다 이런 자리에는 왕이 직접 얼굴을 들이밀어 박수갈채를 유도했다.
저런 광장을 무대로 또 자주 이뤄진 대규모 행사가 반승飯僧이라, 이는 글자 그대로 스님을 대접하는 행사라, 이런 모습은 한국에서는 거의 자최를 감춘 반면, 동남아 지역에 가면 매일 해뜨기 전 탁발행사 같은 형적으로 남았다.
반승은 툭하면 그 참가 승려 규모가 만명이고, 보통은 삼만을 웃돌았다 하니, 얼마나 성대한 규모였는지 알 만하다. 이런 자리에 고려시대 군주는 거개 모습을 드러냈다.
고려시대는 이런 점에서 여러 모로 조선왕조와는 확연히 달랐다.
나는 조선왕조가 건국됨으로써 대중정치가 사라졌다는 말을 자주 쓰는데, 그 핵심은 저런 카니발과 스포츠의 실종이 결정적이었다.
*** related articles ***
조선의 건국, 왕후장상을 씨로 따지는 시대의 개막
거란 침공에 부활의 팡파르를 울린 팔관회
불교의 쇠퇴는 비익형秘匿形 군주를 강화했다
스포츠광 고려 의종의 대중정치와 격구
'역사문화 이모저모 ' 카테고리의 다른 글
최충과 경쟁한 사설학원들, 모조리 재상이 재단이사장 (0) | 2024.02.03 |
---|---|
쌍기가 일으키고 최섬이 붙인 혁명, 사설학원 난립시대를 낳다 (0) | 2024.02.03 |
과거제가 사설 학원시대를 열다 (0) | 2024.02.02 |
외국인 특채로 벼락 출세한 쌍기와 그의 아버지, 그리고 첫 급제자 최섬 (2) | 2024.02.02 |
땅딸보에 못생긴 강감찬, 최수종은 아니었다 (0) | 2024.02.01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