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기雙兾라는 이는 한국사에서는 과거제를 도입한 인물로 대서특필한다.
그는 신라나 고려 사람이 아닌 짱꼴라 쏼라쏼라 젤싼거 담싼거 외치던 중국 후주後周 사람이다.
그 짝에서 벼슬하며 무승군 절도순관 장사랑 시대리평사 武勝軍 節道巡官 將仕郞 試大理評事 라는 데까지 승진한 상태에서 마침 광종 7년(956)에 광종을 제후로 책봉하는 사신단 우두머리 봉책사封冊使 설문우薛文遇를 따라 고려로 왔다가 병이 나서 그만 귀환하지 못하고 개경에서 치료에 전념해야 했다.
병이 나으니 광종이 그래 니 수고했데이 그래 이제 괜찮나? 따신 아메리카노 한 잔 하제이 하며 불러다가 이런저런 얘기를 하는 와중에
그래 경이 생각하기에 우리 고려는 우째야 나라가 부강해지고 발전할 꺼 같노? 기탄없이 말해보레이 하는 질의에 응하여
통역을 통해 이래 관리를 선발해 갖고는 쫄딱 망한데이, 니 조땐데이, 행시 만들어서 공무원 뽑아야댄데이, 나한테 맡기주마 내 잘 해보께
하며 설득하는데 그 말이 그럴 듯한지라, 문제는 이 친구는 내 사람이 아니라누 사실.
그래서 광종은 아예 이 일을 관장케 하고 싶어 후주 황제한테 표문을 지어올리기를
"폐하 그짝에서도 쌍기는 빌로 쓸모도 없일끼지만, 우리한테는 꼭 필요해서 제가 데불꼬 써 보께요. 그짝에서도 공무원 인사적체도 심할 테니, 야 좀 써 볼께요. 허락해 주이소."
라고 하니, 그래 니 맘대로 해레이 해서 그대로 고려왕조에 눌러앉게 되었다.
외국인 특별채용인 셈이라, 그를 아예 눌러 앉히려면 고소득 연봉과 파격 승진만이 있을 뿐이었다.
고려사 열전에는 파격 발탁해 원보 한림학사元甫翰林學士라는 자리로 승진케 했다는데 원보라, 으뜸 어른이라는 뜻으로 보아 한림학사 중 으뜸으로 친 듯하고,
그러고도 채 한 해가 되기 전에 문병文柄을 맡겼다 했으니 한림원 전체를 관장하는 자리에 오른 듯하다.
광종 9년(958)에는 과거제 도입을 건의하여 마침내 관철했으니, 그의 발의이기는 했겠지만 광종과 내통한 제안이었음은 말할 나위가 없다.
이 과거제 시험을 관장하는 우두머리를 지공거知貢擧라 하는데, 그 자리를 맡아 시詩·부賦·송頌·책策으로 진사進士 갑과甲科에 최섬崔暹 등 두 사람, 명경업明經業에 세 사람, 복업卜業에 두 사람을 선발해 공무원으로 특채한다.
쌍기를 대서특필해야 하는 인물임에는 틀림없지만, 한국사 사상 최초로 과거를 통해 등단한 인물이 최섬이라는 사실도 특기해야 한다.
이후에도 쌍기는 여러 번 지공거가 되어 셤을 주관하는데, 그가 발단한 과거를 통해 그 화려한 인물들이 역사 전면에 등장하는데,
그 유명한 세 치 혓바닥 서희는 약관 스무살에 장원급제했으며, 얼마 뒤에는 강감찬도 역시 이를 통해 중앙 정치무대에 화려하게 등단했다.
김부식 형제들도 아마 같은 코스를 밟았다 기억한다.
이런 벼락 출세는 당연히 시기 질시를 부르게 되는데, 한국말도 못하는 저 외국놈 운운하며 시기하는 사람이 많았다는 고려사 열전 증언은 그것을 증언한다.
아들이 특별채용 형태로 벼락 출세했다는 소식을 접한 그의 아버지 또한 광종 10년(959)에 고려로 이주하게 되거니와, 그의 아비를 일러 시어侍御 쌍철雙哲이라 하고, 당시 후주 청주淸州 수령이었다고 한다.
그의 열전에는 쌍기가 총애를 받는다는 소문을 듣고는 회사回使 왕긍王兢을 따라 고려에 왔다가 그대로 눌러앉아 좌승佐丞에 배수되었다 하거니와,
이 좌승이 정확히 어떤 자리인지는 알 수 없지만, 아들보다 직급이 낮을 수는 없으니 더 높은 자리였을 것이다.
회사回使란 이쪽에서 보낸 사신에 대한 답방 사신단이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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