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에 몰래 왕궁을 빠져나가 보름 만에 나주까지 줄행랑을 친 고려왕 현종 왕순.
따라오지도 않는 거란군을 피해 도망다니다, 돌아보니 거란군은 흔적도 없어 쑥쓰러워지기는 했지만, 어쨌거나 이젠 가오를 생각할 때였다.
1010년 1월 13일일 노령을 넘어 나주에 도착하고서는 거란군이 물러났다는 보고를 접하고는 맥이 풀렸는지, 아니면 이젠 온 김에 좀 쉬고 가야 한다 생각했음인지,
거기서 물경 8일이나 퍼질러 놀다가는 21일 을미乙未가 되어서야 행장을 꾸려 북상을 시작하는데 앞서 본 남행 도망길과 이제 시작하는 복귀하는 길은 조금 달랐다.
그만큼 여유가 많아졌기 때문이기도 하겠거니와, 이제는 민심을 다독일 때가 된 까닭이다.
도망길이 순행길이 된 희유한 케이스가 바로 현종의 피난길이었다.
귀경길에 오른 그는 첫날 복룡역伏龍驛이라는 데서 숙박했으니, 이곳이 어디냐 하니 지금의 광주광역시 복룡역이라 한다.
그러다가 24일 무술戊戌에는 고부군에 들러 하룻밤을 보낸다.
복룡에서 고부까지 사흘이 비는데, 중간중간 느릿느릿 간 까닭이다.
대략 코스를 보면 이랬을 텐데, 당연히 그 중간에 노령을 넘었다. 입암산성 일대를 통과했을 것이다.
고부를 떠나 이튿날인 25일 기해己亥에는 금구현金溝縣에 도착해 묵는다. 이곳은 지금도 지명이 남아 김제군 금구면이다.
그리고 하루가 지난 26일 경자에는 전주에 도착하는데, 몽진 길에는 이곳이 후백제 수도라 해서 지나쳤지만, 복귀하는 길에는 이곳에서만 무려 7일 동안이나 체류하게 된다는 사실이 이채롭다.
아무래도 전주는 대도회라 왕이 오래 머물 만한 시설이 그런 대로 구비했을 것이며, 기회를 빌려 민심을 채방하려 했을 것이다.
이 전주 체류기간 29일 계묘일에는 거란주契丹主 야율융서가 이끄는 거란군이 압록강鴨綠江을 건너 완전히 고려 국경을 벗어난다.
2월 3일 정미일에는 전주를 떠난 행차는 여양현礪陽縣에 묵는다. 이곳은 몽진길에도 들른 지금의 익산이다.
그러고 이튿날 어가는 공주에 닿는다.
따라서 그의 북상 코스는 대략 앞 지도와 같았을 것이다.
공주는 몽진 길에 현종이 그곳 절도사 김은부한테서 극진한 대접을 받은 곳이라, 복귀하는 길목에도 그런 접대가 다시 생각났는지 들렀는데, 이번에 김은부는 색다른 접대를 한다.
색공色供이니 바로 김은부가 자기 딸을 바친 것이다.
전주에서 일주일을 머문 그가 공주에서도 무려 6일이나 머문 이유가 바로 이 치맛폭 때문이었다.
이 대목을 고려사나 고려사절요에서는 "절도사節度使 김은부金殷傅가 장녀로 하여금 임금의 옷을 지어 바치게 하자 이 일로 인하여 그녀를 〈왕비로〉 들이게 되었으니, 그녀가 곧 원성왕후元成王后다"라고 했다.
이는 명백히 김은부가 미래를 생각하고 한 행동이었다. 딸을 바쳐 출세하고자 하는 욕망의 발로였다.
새 장가까지 가게 된 현종은 더욱 기분이 좋았는지 맘껏 즐기다가 2월 13일 정사丁巳에는 공주를 떠나 청주에 도착한다.
이때부터 코스가 몽진길과는 좀 달라지는데 청주 역시 당시 대도회였다.
마침 이때가 2월 보름이라, 이곳에서 사흘 정도 머물면서 행궁에서 연등회燃燈會까지 연다.
이후 2월 보름 연등회가 상례가 되었다 하는데, 전란으로 뒤숭숭한 분위기를 일신하는 데는 역시 카니발 만한 게 없다는 점에서 고려 왕조 역시 똑같은 선택을 했음을 주목해야 한다.
연등회를 주관하고는 이튿날인 16일 경신일에는 청주를 출발해 개경으로 향한다.
어가는 7일 만인 23일 수창궁壽昌宮으로 들어가는 것으로 끝나는데 청주~개경 코스가 사서에서는 누락됐다.
암튼 공주에서 청주~개경 코스는 대략 이랬을 것이다.
그가 개경을 떠난 시점이 1010년 12월 28일 임신壬申이고 복귀가 1011년 2월 23일이니 대략 45일, 한달 보름 만의 귀경임을 본다.
그의 복귀길 전체 여정을 정리하면 대략 앞 지도와 같다.
#고려거란전쟁 #현종의몽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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