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종이 친정한 이른바 2차 고려거란전쟁에서 결국 개경까지 함락 당할 위기가 닥치자 현종은 1010년 12월 28일 임신일에 남쪽으로 줄행랑치기 시작해 1011년 1월 13일 정해丁亥(양력 2월 18일) 노령蘆嶺을 넘어 나주羅州에 입성하니 개경 출발 기준 불과 보름 만이었다.
왕의 행차가 이렇게 빠를 수는 없으니 얼마나 급박했는지를 짐작케 한다. 우사인 볼트보다 빠른 줄행랑이었다.
예서 궁금증.
남쪽은 고려시대 당시에도 개경을 기준으로 삼아 크게 두 가지 통로가 있었다.
나주로 곧장 남진하는 코스와 소백산맥 넘어 경주 방면으로 가는 길이 그것이었다. 두 길은 천안, 구체로는 갈기비가 있는 데서 갈라진다.
현종은 단 코스를 선택했다. 왜?
저 코스는 전반으로 보아 평탄하나 두 개의 고개를 넘어야 한다.
천안에서 공주로 넘어가는 차령산맥 고개가 하나요, 다른 하나는 노령이라 해서 입암산성이 있는 그 코스다.
후자가 상대적으로 험하지만 전자 또한 만만찮다.
소백산맥을 넘어 경상도로 가는 방향을 택하지 않았던 까닭은 그만큼 일단 달아나서 목숨을 건지는 일이 급박했기 때문이라 보아야 할 성 싶다.
문제는 왜 그가 나주까지 갔냐는 것.
이 대목에서 우리가 중요한 점을 놓친 것이 있다. 전주에 머물 때 주변에서 전주는 배반의 땅이라 해서 빨리 털고 지나가야 한다고 했다는 사실이다.
바로 훈요십조 때문인데, 이는 훈요십조가 박술희 쪽에서 조작한 이야기가 있기는 하지만 그것이 살아 움직이는 유훈통치로 작동한다는 대목을 부릅뜨야 한다.
이는 역설적으로 왜 나주인가를 해명한다.
그랬다. 나주는 태조 왕건이 개척한 식민지였다. 나주 오씨 본거지였다.
고려는 언제나 왕건의 그늘 아래 있었다.
이 줄행랑 사건은 다음 이야기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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